2019년 8월 22일 오마이뉴스 보도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으로 칭해지는 양칠성은 누구인가

인니 독립 위해 싸운 영웅으로 평가 받지만, 일각에선 ‘친일’ 논란도

 인도네시아 가룻(Garut)시 관립영웅묘지에 있는 양칠성씨의 묘비
▲  인도네시아 가룻(Garut)시 관립영웅묘지에 있는 양칠성씨의 묘비
ⓒ 배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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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23일 오전 9시 54분]

인도네시아에는 한인 독립 영웅이 있다. 양칠성이 그 주인공이다. 인도네시아 가룻(Garut)시 관립영웅묘지에는 ‘외국인독립영웅’ 양칠성의 묘가 있다.

지난 8월 16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8월 17일)을 앞두고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UI)에서 UI와 인도네시아역사연구협회(히스토리카)는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한국인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서는 194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과 관련된 한국인(조선인)들을 재조명했다. 그 중 가장 많이 연구되고 알려진 인물이 양칠성이다. 이 세미나에는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저자인 배동선씨가 연사로 참석했다. 지난 20일~21일 전화와 서면 인터뷰 등을 통해 그에게 양칠성에 대해 물었다.

 16일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에서 열린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한국인의 역할' 세미나에 참석한 배동선 작가(제일 오른쪽)
▲  16일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에서 열린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한국인의 역할” 세미나에 참석한 배동선 작가(제일 오른쪽)
ⓒ 배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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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 출신인 양칠성은 1942년 2월, 일본군으로부터 강제징용당해 포로 감시원으로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이던 인도네시아로 왔다. 네덜란드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과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에서 맞붙었고, 당시 이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던 일본군은 8만 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감시하고 사역시키는 일을 감시할 군무원이 필요했다.

그의 인도네시아 근무기간 중 일본은 패망하여 인도네시아에서 군을 철수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들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양칠성도 계속해서 인도네시아에 남은 조선인 중 한 명이었다. 양칠성은 그의 일본인 상사로부터 부대 이탈을 권유받은 후 일본군을 이탈한 조선인,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뛰어든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뛰어든 '빵에란 빠빡(Pasukan Pangeran Papak)' 부대원 '빵에란 빠빡(Pasukan Pangeran Papak)' 부대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양칠성이다.
▲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뛰어든 “빵에란 빠빡(Pasukan Pangeran Papak)” 부대원 “빵에란 빠빡(Pasukan Pangeran Papak)” 부대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양칠성이다.
ⓒ 한인니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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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정이 그의 의사였는지 아니면 강제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독립군에서 무기 다루는 기술을 배워 폭파전문가가 되었다고 알려진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군 부대에서 1948년 11월까지 약 3년간 네덜란드군과 맞서 싸우다 잡힌다.

그리고 1년 후, 1949년 8월 10일 양칠성은 네덜란드군에 의해 처형당한다. 배동선 작가는 이를 두고 “자바의 휴전 발효 바로 하루 전 양칠성을 처형한 것으로 보아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전한 외국인들을 절대 살려 두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군 부대 이탈 이후 3년간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활약한 그의 이력은 현재 많은 한국인들에게 거부감 없이, 혹은 자랑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 중엔 친일 행각으로 보이는 행동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인 양칠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처형장에서 양칠성은 그의 일본인 상사의 선창으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고 총성이 울리기 직전 ‘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점은 아직도 식민 지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지켜보는 한국인들에게 분명 거부감이 생기는 지점이다. 그러나 다른 연구에서는 독립, 혹은 자유를 의미하는 인도네시아어 단어인 ‘Merdeka’를 외쳤다는 기록도 있다.

오랜 시간 양칠성을 재조명하기위해 노력해 온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사공경 원장은 이와 관련하여 양칠성에 관한 새로운 기록에 대해 소개했다. 양칠성이 네덜란드 군에게 체포된 이후 반둥(Bandung) 지역의 미결수 형무소 반쩌이(Banceuy), 사형선고 이후 수카미스킨(Sukamiskin) 형무소, 자카르타(Jakarta) 찌삐낭(Cipinang) 형무소 등으로 전전했는데 처형 직전 수감됐던 찌삐낭 형무소에서 그와 함께 지낸 동료는 ‘머리와 수염이 산발된 양칠성의 모습은 마치 귀신과 같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기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공경 원장은 양칠성이 처형 직전 기미가요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는 건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게릴라전을 펼칠 때 양칠성에게는 사랑하는 여인(Lience Wenas)이 있었는데 둘은 사실혼 관계였고 둘 사이에는 자식도 있었다고 한다. 양칠성은 이 아내와 자식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게릴라전을 펼치며 긴박한 와중에도 이들을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처형된 이후 인도네시아의 국기인 ‘메라뿌띠(Merah Putih)’로 그의 관을 덮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하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는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인을 사랑한 사랑한 독립 영웅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 사공경 원장의 의견이다.

또 배동선 작가는 이를 두고 “9개월간 가혹한 포로 생활 끝에 용기와 기백을 잃고 피폐한 상태에서 처형 직전 어떤 말을 외쳤는지를 두고 그의 일생을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오히려 그가 아무 말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라고 밝혔다.

덧붙여 그는 “양칠성이 비판받는 친일행각 중 대부분은 생존을 위해, 혹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므로 ‘친일’이라는 표현보다는 ‘일본이 묻은’ 사람이라는 평가가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배동선씨에 따르면, 1995년 그의 묘비가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바뀔 때만 해도 한국 대사관과 한인 사회는 반기며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현재 한국 대사관은 그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배동선 작가는 “그를 항일투사나 한국 입장에서 독립 영웅으로 평가할 순 없다”면서도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적 환경을 고려하면 그는 지나치게 엄격한 평가를 받으며 소외받고 있다”라고 짚었다. 배 작가는 그에게 ‘뭍은’ 일본의 흔적보다는 3년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싸운 역사를 집중하여 평가하면 한국과 인도네시아, 혹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협력적인 동반자적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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