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자족에 대한 군부의 토벌 작전이 있은 지 1년이 지났으나 미얀마 정부의 송환과 재정착, 재발 방지 계획은 요원하다. 국제사회의 미얀마 정부에 대한 비난은 여전하고,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정부는 군부의 눈치를 보면서 재송환 프로그램을 가동했지만 근본적으로 로힝자족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고수한다. 군부는 군부정권 당시부터 유지한 로힝자족에 대한 척결을 추진하며 내적 결속을 강화한다. 미얀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이 강화될수록 내정간섭이라는 발발심이 확대될 것이고, 버마족과 불교가 중심인 미얀마에서 로힝자족에 대한 배제정책은 장래 어떤 정부가 등장하더라도 쉽게 해결할 과제는 아닐 것이다.
장준영(한국외대 인도연구소)
현대 미얀마와 로힝자족 문제
지난 6월 23일자 『방콕포스트』(Bangkok Post)에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2017년 8월, 여카잉주(Rakhine State)[1]에서 발생한 로힝자족(Rohingya)[2] 인권유린 국가진상조사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f Inquiry) 내 외국인 포함 여부를 두고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 군총사령관이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 국가고문에게 진노하여 쿠데타 가능성을 직접 언급했다는 내용이다.
기사를 쓴 래리 자건(Larry Jagan)[3]에 따르면, 각 지역의 군대는 모든 작전을 임시 중단하고 수도 네삐도(Nay Pyi Taw)를 포위하려고 움직였으나 우기로 인한 열악한 날씨사정으로 인해 군사작전을 중단했다. 이에 앞선 5월 말,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이 진상조사위원회에 외국인 3명을 포함하기로 결정했을 때 연방의회 소속의 현역 군부는 “누가 국가를 통치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즉각 반대 의견을 냈다. 제 1야당인 연방단결발전당(USDP)과 여카잉민족당(ANP)도 외국인의 개입이 있으면 주권 침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군부의 입장을 옹호했다. 20년 이상 미얀마를 관찰한 베테랑 언론인이 군 최고 간부들(top brass)의 언급을 인용하여 기사를 썼다는 점, 의회 소속 군인의 반발이 있었다는 점에서 군부와 정부 간 대립이 본격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사가 나가고 사흘이 되지 않아 저테(U Zaw Htay) 정부 대변인은 이 기사는 “완전히 잘못된”(totally wrong)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그에 따르면 6월 8일 회담에서 정부측 인사는 진상조사위원회에 3명의 외국인이 참여하는 방안을 군총사령관과 부사령관에게 설명했고, 이들도 정부의 의도를 이해했다. 따라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래리 자건의 주장처럼 ‘심각한’ 갈등이 없었다. 나아가 회담이 있은 며칠 후 민아웅흘라잉 사령관은 전 스위스 외교관 출신의 크리스틴 슈레너 버기너(Christine Schraner Burgener) 유엔사무총장 미얀마 특사를 만난 자리에서 진상조사위원회에 외국인의 참여를 수용했다. 이로써 이번 군부의 쿠데타설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로힝자족 문제는 현재 미얀마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의 압축본이다. 1948년 독립 당시 연방 구성에 있어서 불거진 소수종족의 처우 문제, 군부정권이 불교와 버마족(Burman) 중심으로 사회구조를 재편함에 따라 변방으로 취급된 소수종족에게 가중된 소외감, 비대해진 군부의 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대안세력의 부재, 국제사회에서 장기간 고립된 이유로 현실을 직시하는 객관적 시각이 부족하고 이로 인해 쇼비니즘(chauvinism)의 출현 가능성 등을 들 수 있다. 반세기 이상 만에 출범한 민간정부의 성패를 넘어 향후 통합된 국민국가를 완성하고 꾸려나갈 토대는 로힝자족 문제라는 프리즘으로 투영되고, 현실을 직시하고 대응하는 정부의 자세가 얼마나 굴절되는가에 따라 미얀마의 미래를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독립 이후 버마종족과 소수종족
한 때 영국 식민당국의 관료였던 사회경제학자 퍼니벌(J.S. Furnivall)은 식민 버마사회를 복합사회(plural society)로 명명했고, 그 배경을 대영제국의 전통적 식민지배 방식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에서 찾았다. 즉 소수의 식민관리는 원활한 식민통치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외래인을 수용했는데, 미얀마의 경우 인도 따밀나두(Tamil Nadu) 출신 쿨리(coolie, 苦役)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 중 일부는 중간관리가 되어 식민당국에 협력함으로써 현지인들 위에 군림하였다. 현지인은 식민 당국에 의해 다시 버마족과 비버마족으로 분리되었는데, 전자가 거주하는 지역을 버마 프로퍼(Burma Proper) 또는 행정버마(Administrative Burma), 후자의 거주지를 변방지역(Frontier Area)로 나눈 행정구역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아웅산(Aung San) 장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과 손을 잡고 대영 투쟁에 돌입했을 때 이미 소수종족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 또는 자치권을 약속받은 상태였고, 2차 대전은 한 국가 내 두 진영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1800년대 말 전국 곳곳으로 도래한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소수종족의 정체성을 만들어 주었는데, 예를 들어 꺼잉족(Kayin, 또는 까렌족 Karen)은 선교사들이 발명한 그들만의 신화(神話)를 수용했다. 소수종족들에게 독립 버마는 탐탁치 않는 환경의 변화였고, 이를 수용할 의지는 없었다. 1949년 1월, 꺼잉족을 시작으로 분리주의운동이 촉발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연방정부는 ‘양공정부’로 불릴 정도로 전국은 내전에 휩싸였다. 무능했던 민간정부(1948-62)는 군부가 이끈 과도정부(1958-60) 이후 다시 군부의 쿠데타로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졌다.
네윈(Ne Win)이 이끈 군사정부는 모든 것을 버마족 중심으로 회복시킨다는 명분으로 급진적인 사회구조의 재편에 돌입했다. 민간정부에서 진행하던 연방운동(federal movement)은 폐지되었고, 경제적 독립이 진정한 독립이라는 주장으로 군부는 인도인, 중국인, 영국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다. 무장반군들은 군부가 실시한 4대 근절(four cuts: 식량, 자금, 정보 획득, 반군 모집 봉쇄) 정책에 따라 협상의 대상이 아닌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소수종족은 고립되었고, 버마족이 국가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는 구도로 전환했다. 영국이 취한 분할통치전략을 군부가 변칙적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군부는 평등한 사회를 구성한다는 차원에서 1974년 행정구역을 버마족 중심의 7개 행정주(Division)와 소수종족 중심의 7개 자치주(State)로 재편했는데, 이로서 제한적으로나마 자치권이 보장되던 소수종족은 버마족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 구조하에 놓이게 되었다.
1988년 친위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버마족에 불교를 추가함으로써 소위 버마족화(Burmanization) 또는 미얀마화(Myanmarfication)를 완성했다. 신군부는 역사를 돌아보면 군권이 강력했을 때 국가가 강성했다고 자평하면서 왕조를 닮고자 했고, 2006년 수도를 옮겨 왕궁이라는 이름의 네삐도(Nay Pyi Taw)로 확정했다. 전통왕조에서 불교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 국가의 통치 이념이자 국가 통합의 매개체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변화한 사회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동시에 선교사를 포함한 외국인과의 접촉을 국가를 파괴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정의했다. 특히 그들은 “국민의 3대 대의”(연방의 분열 방지, 국가 결속, 주권 영속)를 공표함으로써 군부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했다. 초헌법적인 이 원칙은 모든 공직자가 취임할 때 선서로서 효력을 발생한다.
전국 정당을 표방하는 국민민주주의연합(NLD)도 사실상 버마족 중심의 정당임을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총선에서 NLD는 버마족이 집중 거주하는 행정주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나, 소수종족 지역인 자치주에서는 지역정당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특히 지역색이 강한 샨주(Shan State)와 로힝자족이 거주하는 여카잉주에서는 사실상 패배했다. 또한 민간정부는 지역 주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전국에 아웅산 장군의 동상을 세우거나 신축 교량이나 건물에 아웅산 장군의 이름을 명명하는 경우가 많아 주민의 반발이 빗발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소수종족 거주지역에서 더욱 빈번하고, 실제로 2017년 정부가 몽주(Mon State)에서 건설한 교량을 주민의 동의 없이 ‘아웅산교(橋)’로 선언한 뒤 NLD는 보궐선거에서 패배했다. 필자가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할 당시 만났던 소수종족 청년들은 미얀마의 민주화보다 그들의 독립을 더 원했고, 소수종족의 열망을 묵살한 아웅산 장군의 혈육이라는 측면에서 아웅산수찌가 장래 지도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지지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했다.
버마족이 기득권을 향유하는 사회구조의 개선 없이 진행되는 ‘21세기 삥롱회담’에서 정부가 평등과 자치에 기초한 연방주의(federalism)를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소수종족의 신뢰 형성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 회담은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모임”이 되었다. 아직까지 미얀마는 버마족을 위한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힝자족에 대한 국내 시각의 차이
미얀마가 버마족 중심의 국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정부에서 규정한 버마족 외 134개 종족은 이미 왕조시대부터 현재 미얀마의 일원이었고, 한 군부지도자는 가장 이질적인 꺼잉족을 의식하여 미얀마의 모든 국민은 “몽골계”로 범주화했다. 언어, 혈통, 종교와 같은 근원적 유대는 다르지만, 과거 군사정부에 따르면 미얀마에 거주하는 모든 구성원은 같은 지역에서 같은 물을 마시며 애락(哀樂)의 순간에 서로 애정을 느끼며 살아온 혈연의 집합체이다.
언어적으로 볼 때 몽족(Mon)의 언어는 몽-크메르 계열로 중국-티베트어계인 미얀마어와 이질적이고, 친족(Chin)은 미얀마 문자대신 로마자를 사용하며, 혈통적으로 샨족(Shan)은 태국인과 더 가깝다. 종교적으로 중국에서 내도한 빤데(Panthay, 潘泰) 무슬림, 인도와 아랍상인이 현지인과 통한한 제버디(Zerbadi) 무슬림, 인도 힌두교도들의 후손까지 다양하다. 로힝자족도 독립 초기 의회에서 여카잉 무슬림(Arakanese Muslims)으로 합의되어 명명되었다.
그런데 왜 유독 로힝자족만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는가? 미얀마 정부의 인위적인 역사 만들기, 경제적 배경, 로힝자족의 현지사회 적응이나 동화 정도 등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역대 미얀마 정부들은 로힝자족을 하나의 독립된 종족집단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인정할 가능성이 낮다. 학계에서는 로힝자라는 용어와 이들이 언제부터 지금의 땅에 거주했는가에 대해서 갑론을박이다. 그러나 로힝자족을 제외한 미얀마 정부와 국민의 여론은 단호하고 단순하다. 1차 민간정부(1948-62)에는 로힝자족을 포함하여 여카잉주에 거주하는 무슬림을 여카잉 무슬림(Arakanese Muslims)으로 통칭했으나, 1974년 사회주의 헌법이 공표된 이후로 벵골인(Bengali), 치타공인(Chittagongnian) 등이 정설이 되었다. 그러므로 미얀마 정부는 로힝자족이 식민시기에 무단으로 국경을 넘어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 불법이주민이고, 로힝자라는 이름도 스스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꺼메잉족(Kamein, 또는 까만 Kaman: 페르시아어로 화살이라는 의미임)은 여카잉주에 거주하는 7개의 토착 소수종족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기 때문에 무슬림이더라도 미얀마 시민으로 인정받는다.
둘째, 방글라데시와 달리 로힝자족이 집중 거주하는 마웅도(Maungdaw), 부디다웅(Buthidaung), 로디다웅(Rathedaung) 등 3개 지역은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땅이었다. 식민시기 당시 로힝자족을 포함하여 방글라데시(당시 인도) 거주민들이 현재 미얀마 땅으로 넘어와 농사를 지었으나 정착은 하지 않았다. 1971년 동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하여 방글라데시가 되자 여카잉주의 소수종족들은 로힝자족이 독립이나 분리와 같은 독자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로힝자라는 용어 사용을 꺼려했다. 지역적 차원에서 여카잉주의 옥토는 로힝자족의 유인요인이 될 수 있었지만, 지역 소수종족이나 미얀마 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1871년 인구조사에서 여카잉주 무슬림은 6만4천명이었고, 1974년 비상이민법으로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떠난 무슬림이 20만 명이었는데, 2014년 기준 로힝자족이 집중 거주하는 세 지역의 인구가 105만 명이었다. 정확한 통계는 찾을 수 없지만 로힝자족의 수는 10배 이상 증가했다는 현지 정치분석가의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즉 로힝자족의 거주 지역과 생계를 위한 농토가 확대됨에 따라 소수종족은 그 반대의 상황을 겪게 된다.
미얀마 정부 입장에서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경지역은 나가족(Naga)을 포함하여 반군의 활동지역으로서 치안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부(富)를 생산하는 데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까친족(Kachin), 꼬깡족(Kokang), 와족(Wa) 등 중국 국경지대의 소수종족은 정전협상의 당사자이고, 지하자원과 천연자원의 점유를 두고 정부군과 소수종족 반군은 항상 대치국면을 형성해 왔다. 또한 국경부(Ministry of Border Affairs)의 설치도 군부가 국경의 치안 유지보다 이 지역에 편재한 부존자원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만약 여카잉주가 다양한 부존자원의 보고(寶庫)이고, 미얀마가 인도, 방글라데시와 교류를 활발히 했다면 로힝자족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달랐을 것이다.
셋째, 2012년 폭력사태의 발단은 로힝자족 남성이 불교도 여성을 강간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지역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유일한 집단이 로힝자족으로 간주하고, 현지에 이주한 역사가 길지만 미얀마 사회에 스스로를 적응하려는 노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사실 지역사회를 제외하고 로힝자족의 존재를 인식한 시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48년 독립할 당시 버마족이 거주하는 8개의 주(division)를 제외하고 소수종족 지역은 샨주, 까친주, 꺼잉주, 꺼야주(Kayah, 또는 꺼잉니 Kayinni), 친 특별주(Chin Special Division) 등 5개 지역으로 국한되었다. 이 당시 로힝자족이 포함된 여카잉주는 친 특별주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각 소수종족은 10년 후 국민투표를 통해 연방 탈퇴 또는 자치를 보장받았다. 1974년 헌법이 공포되면서 여카잉주는 친 특별주에서 분리되었는데, 불교도가 다수인 여카잉족 중심의 독립 주가 탄생함으로써 이 주에 잔존하게 된 로힝자족은 불교도들과 구별되면서 상대적으로 외부에 쉽게 노출되었다.
빤데와 제버디 무슬림이 이슬람교를 지키는 대신 복식(服飾), 현지식 작명(作名), 현지어 구사 등에 있어서 현지화를 지향한 반면, 로힝자족은 그들의 생활터전을 넓히는데 집중해 왔다. 외부로 알려진 이들에 대한 미얀마 군부의 군사작전은 1978년, 1991–1992년, 2012년, 2015년, 2016–2017년 5차례이지만, 군부정권이 자행한 국가폭력은 일상적이었다. 그래서 로힝자족은 국경의 군과 경찰의 움직임에 따라 방글라데시로 월경을 했다가 다시 지금의 땅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해 왔다.
나아가 2000년대에 들어 미얀마에서 극우불교도들이 등장하면서 반무슬림 정서가 확대되었다. 우연의 일치일수 있겠지만 이 당시 미얀마와 미국 관계가 최악에 다다랐는데, 미얀마 언론은 이라크전에 참전한 미국을 맹비난함과 동시에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객관적 정보가 통제되는 국내 상황에서 삐뚤어진 종교관에 빠진 승려들과 추종세력의 등장은 로힝자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여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로써 로힝자족은 잠정적인 범죄자 또는 연방의 통합에 걸림돌이 되는 집단이라는 고정관념이 형성되었다.
로힝자족 이슈분석
로힝자족은 미얀마를 모국으로 간주하는가?
1942년 일본이 미얀마 전역을 점령하자 로힝자족 또한 격렬히 저항했다. 일본군과 로힝자족의 대립으로 307개 마을이 전소되었고 1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8만 명이 피난을 떠났다. 일본은 이들을 영국의 앞잡이로 간주했고, 피난을 떠난 로힝자족은 군대를 결성하여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이 여카잉주를 합병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영국은 무슬림지역(Muslim National Area)의 분할을 약속하며 이들의 투쟁을 독려했다. 1947년 헌법에 로힝자족이 시민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우 누 총리는 1954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로힝자족은 다른 소수종족과 같은 지위를 보장받는다고 언급했다. 이 당시 로힝자족(4-7명)은 연방의회에 소속되었고, 양공대학교 내 로힝자족 학생회도 합법단체로 등록되었다.
타 소수종족과 마찬가지로 로힝자족도 영국의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독립을 전후하여 자치권 확보에 돌입했다. 1947년 8월 무슬림 자치주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두보차웅 선언(Dubbo Chaung, 1947.8.20)을 통해 무자히드(Mujaheed)당이 창당했다. 1964년 무장단체로서 로힝자독립군(RIF: Rohingya Independent Force)이 창설된 뒤 1998년까지 총 6개 무장단체가 생몰했는데, 군부와 교전이 아니라 내적 파벌갈등으로 부침을 거듭했다. 2016년, 여카잉로힝자구원군(ARSA: Arakan Rohingya Salvation Army)이 탄생했는데, 이 단체는 중동 극우주의단체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수뇌부 또한 테러리스트들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이전 무장단체들이 주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게릴라전을 펼쳤다면, ARSA는 로힝자족 거주 지역 내에서 조직된 점이 특이하다. 그간 저지대 로힝자족들은 반군투쟁과 같은 정치군사적 목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얀마 정부 또한 ARSA를 이전 무장단체의 명맥을 잇는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로힝자족과 일부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8-9세기에 들어 중동 출신 이슬람 상인과 함께 미얀마로 내도했고, 17세기 여카잉족 중심의 불교도 여카잉왕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무갈왕국의 영향력 하에서 이슬람 전통과 관습을 유지했다. 그러므로 다수의 로힝자족은 여카잉지역이 그들의 원거주지이자 그들 스스로는 이 지역의 토착민으로 인식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인도와 아랍세계에서 건너 온 무슬림 집단과 공존하면서 거주했기 때문에 로힝자족이 반드시 여카잉주 무슬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후자는 광의의 의미가 된다. 또한 UN보고서에 따르면, 미얀마 국경과 인접한 방글라데시 산악지대에는 총 11개 종족이 거주하는데 이들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로힝자족만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이 지역을 떠나줄 것을 요구하는 압력을 행사했다. 시기를 같이 하여 미얀마가 점진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됨에 따라 로힝자족들이 현재 여카잉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로힝자족 입장에서 환경적으로 척박하고 종교적으로 배제된 지역을 벗어나 영국 식민당국에 협력함으로써 방글라데시에서보다 더 나은 생활환경을 보장받았다.
로힝자족은 식민시기의 사회구조와 그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독립이후에도 연장하려고 시도했다. 무자히딘당의 존재가 그러하고 우 누 총리는 무슬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로힝자족 거주지역을 마유(Mayu)행정지역으로 분리시키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마유 행정지역은 곧 군의 직접 관할권에 편입되었는데, 네윈의 집권은 집단적으로 로힝자족의 수난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로힝자족은 그들이 중심이 된 국가나 토후국(princely state) 등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구현한 사례가 없고, 앞서 보았듯이 독립 이후 조직된 무장단체 내에서도 권력 갈등으로 와해와 재출현을 반복하는 악순환만을 되풀이했다. 로힝자족들은 그저 척박한 땅을 등지고 경제적으로 안락한 지역만을 원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들은 노마드(nomad) 기질이 다분한 종족인가? 독립 이후 로힝자족은 다른 소수종족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힝자족들이 내부적인 결속을 유지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 그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일사불란한 체제를 보이지 않았다. 개별적으로 그들의 선조들이 미얀마에 거주했다는 서류를 제시하며 국민이 되기 위한 시도는 있었으나 정부의 고자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정부의 탄압이 잠잠해지면 로힝자족은 종교를 무기로 그들만의 영토를 슬그머니 넓혀갔다.
군부의 이익
미얀마 군부는 독립의 핵심세력이었고, 1차 민간정부에서 영국의 유산으로서 소수종족 중심의 군부구조를 극복하고, 군 본연의 직업주의를 강화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민간정부의 실패는 결국 1958년 10월, 우 누(U Nu) 총리의 요청으로 군부가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일부 시민의 반대도 있었지만 18개월간의 군부정권은 무장반군을 소탕하고, 범죄율을 낮추었으며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군부는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해명해야 하거나 귀책사유를 무마하기 위해서 1958년의 경험을 꺼내들었다. 1962년과 1988년 쿠데타에서 군부는 그들의 구국(救國)정신에 의거 위기에 빠진 국가를 수호했다고 자평한다. 나아가 반세기 이상 집권하고도 정치경제적으로 어떠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연방의 보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한다. 군부는 다원주의보다 일원주의를 선호한다. 그렇기 때문에 2010년 ‘아랍의 봄’이 촉발되었을 때 군부는 냉전 해체 이후 동구권의 몰락을 복기시키면서 점진적인 변화만이 미얀마가 분열되지 않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한다. 딴쉐(Than Shwe) 전 군사평의회 의장은 “방금 판 물에서는 깨끗한 물을 기대할 수 없다.”는 미얀마 속담을 들먹였다.
어떻게 보면, 미얀마 군부는 국제사회에 최악의 정권으로 비춰지던 그들의 이미지를 버리고 점진적인 개혁과 개방을 선택함으로써 그들의 기능을 재설정함과 동시에 정치권에 항구적으로 생존하려는 전략을 선택한 것 같다. 그러한 전략이 맞는다면 군부 입장에서는 연방의 보존을 위한 정전협정의 완성과 국민통합이 완성되지 말아야 한다. 군부 또한 이질적인 각 종족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데, 그들은 군부가 지향하는 구조, 즉 다원주의가 아니라 일원주의로 국가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63-64년, 1980년 등 두 차례에 걸친 무장반군과의 정전협상에서 정부는 소수종족에게 무조건적 연방 편입과 사회주의체제의 수용만을 요구했을 뿐 소수종족의 요구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제 2차 군부정권(1988-2011)에 들어서도 군부는 소수종족에게 그들의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했고, 상호간 불신은 민간정부가 출벌할때까지 역대정부의 유산으로 남겨두었다. 편집증에 가까운 소수종족에 대한 군부의 행태는 군사지도자 1인의 개인적 성향과 불교와 버마족 중심으로 국가를 재편하려는 버마족화 또는 미얀마화에 근거한다. 이 두 소명의식의 가장 원거리에 위치한 종족이 바로 로힝자족이다. 네윈은 이교도 인도인에 대한 극심한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이 있었고, 1988년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인도의 대 미얀마 군부정권에 대한 비난 수위는 최고조에 달하면서 미얀마와 인도 관계는 최악에 달했다.
미얀마 정치변동
군부는 인권탄압이라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있을 때마다 영국 식민통치가 없었더라면 미얀마는 왕조시기처럼 타자(他者)의 구별 없이 평화롭게 공존했을 것이라며 탄식해 왔다. 그렇다면 군부가 통치하는 동안 그들이 행한 분할통치와 내부 식민지 사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변화한 환경을 수용하지 않는 군부의 일방주의는 식민시기에 그러했듯이 국가 내 새로운 계급구조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이렇게 편협한 시각은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의 입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민간정부도 식민지 이전 로힝자족의 도래와 정착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아예 그들의 역사에서 로힝자족을 재조명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작금의 로힝자족 사태는 군부가 그들의 계획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군부는 ‘눈엣가시’였던 로힝자족이 먼저 갈등을 조장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범죄에 연루된 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로힝자족에 대한 탄압을 일삼았다. 그들은 로힝자족이 거주하는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로힝자족을 살해함으로써 로힝자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4대 근절(four cuts) 정책을 시행 중에 있다. 로힝자족이 사망하거나 아니면 제 3국으로 이주하면 여카잉족을 포함하여 원주민들이 이 지역으로 재이주할 수 있다는 매우 단순한 계산이 서 있다. 여카잉주의 로힝자 ‘청정지역’을 꿈꾸는 것이다. 현재까지 군부의 전략은 성공적이다. 그리고 ‘인종청소’라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민간정부와 나누고 있지만, 실제로 국제사회는 군부의 잔혹한 행위보다 아웅산수찌의 무능이나 무관심에 비난수위를 더 높인다. 국내적으로도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민간정부가 군부를 견제할 법적 장치뿐만 아니라 민간우위의 원칙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군부에 대해 방임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군부는 정전협상을 포함하여 정치 분야에서 독립적인 이해당사자로서의 지분을 보장받고 있으므로 정부의 눈치를 살필 필요조차 없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로힝자족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미얀마 군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여카잉주 지역사령관을 포함하여 몇 명의 군 수뇌부에 대한 표적 제제를 실시 중이다. 의도치 않게 민간정부가 국제사회의 비난에 대한 군부의 방패막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군부는 적지 않은 이익을 취한다. 첫째, 군 내부 결속을 유지하고 그들만의 직업의식을 강화한다. 정치군인으로 집단화된 후 군부는 국가 수호라는 군 본연의 임무보다 경제행위자로서 국가의 거대한 포식자로 변모했고, 군사문화는 사회의 말단까지 침투했다. 그러나 2011년 이후 전지전능했던 군부의 역할이 대폭 축소되면서 고위급 군부를 중심으로 상대적 박탈감이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국내 치안유지라는 군 본연의 임무에 집중함으로써 군 내부로 향하는 이반을 방지하고 동시에 결속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둘째, 국내적으로 군부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켜 국민을 위한 군대로 새로운 면모를 전시하려는 차원에서 국민들 사이에서 매우 부정적인 로힝자족에 대한 여론을 적극 활용한다. 2017년 10월 퇴역 군인, 불교 승려, 일반 시민 등 수천 여명이 군부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는 ARSA와 같은 테러집단과의 교전을 통해 국민의 안녕과 재산을 보호하는 군부 본연의 소임에 대한 국민적 지지로 해석된다. 그 이면은 장기간 외부의 정보 유입을 차단하고 국내적으로 편협하고 편향적인 시각을 국민에게 주입한 군부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씁쓸한 현실이 자리한다. 셋째, 군부가 쿠데타와 같이 정치에 개입할 경우 또는 여카잉주로 국한하여 계엄을 선포할 경우 로힝자족 문제에서 그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국가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에 외국인 3인을 포함하는 방안을 통과시켰고, 군부는 여전히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만약 진상조사위원회가 군부의 의도를 충족시키는 결과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군부 스스로 판단했을 때 연방의 분열 가능성이 농후하고 주권을 영속하지 못할 경우, 궁극적으로 정부와 군부가 갈등하는 구도가 형성될 경우 정치적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군부의 정치개입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민간정부의 미래
현 민간정부의 실권자인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이 가택연금 중이거나 재야시절 때 쓴 글들에서 로힝자족과 관련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국민민주주의연합(NLD)의 당헌에는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소수종족의 통합을 지향하지만, 소수종족의 일원에 로힝자족이 포함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2014년, 필자가 띤우(Tin Oo) NLD 고문을 만났을 때, 그는 미얀마 내 여론과 동일한 의견을 제시했다. 로힝자족의 거주 기간이 100년 이상이 되었고 그들의 후손이 미얀마 땅에서 태어났으며, 무엇보다 이들에 대한 인권 탄압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군사작전을 시행하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군부에게 책임을 돌렸다. 역대 정부의 무능을 지적한 띤우 고문의 견해를 현재 민간정부에 대입시키면 그 상황과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는 군부를 제어하지 못하고, 아웅산수찌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넘어 신격화된 국내적 상황과 그가 가진 역량 이상을 기대하는 세계 여론으로 인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군부와 일부 국민들은 내정간섭이라고 외부의 시각에 날선 비판을 하고, 아웅산수찌의 역량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외부자들은 민주주의의 아이콘이라는 그의 과거 위상을 들먹이며 보편적 시각의 수용을 촉구한다. 그 어디에도 로힝자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미 국민들에게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은 로힝자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단시일에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진상조사위원회에 포함된 외국인 3인 가운데 콥삭 추티쿨(Kobsak Chutikul) 전 태국 외교관과 빌 리차드선(Bill Richardson)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위원회의 활동에 불만을 품고 사퇴했다. 로힝자족의 본국 송환과 재정착을 위해 활동할 인도적 지원·재정착·개발을 위한 연합 기업(UEHRD)의 재정은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족치 않고 성과가 없을 경우 외부의 추가적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역의 불교도들은 로힝자족의 재정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며, 이로 인해 폭력사태의 재발 가능성은 상존한다.
‘21세기 삥롱회담’과 같이 회의를 위한 회의만을 반복하는 미얀마 정부의 자세는 긍정적인 미래를 낙관하는 걸림돌이 된다. 나아가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을 포함하여 정부와 군부는 국제사회가 미얀마의 문제를 왜곡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그들만’의 만들어진 역사의식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미얀마 정부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수용하여 로힝자족을 미얀마 시민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 반대로 국제사회는 미얀마 정부와 평행선을 달리며 로힝자족에 대한 ‘인종 청소’를 중단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을 국민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꺾지 않을 기세이다.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면 그것은 앞으로 미얀마에 어떠한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현재와 같은 구도는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변성이다. 오히려 군부의 정치력이 더욱 강화되면 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며, 현재와 같이 권력을 분점한 기형적 구도에서 군부는 정부를 방패막이로 그들의 기득권을 적극적으로 향유할 것이다. 군부가 다시 정치권력을 장악하면 미얀마의 국제적 고립은 예상된 수순이므로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던 노력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또한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의 능력에 대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국제사회는 모든 문제를 그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단순한 기대를 버려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제사회는 아웅산수찌를 비롯하여 미얀마 정부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기보다 군부가 로힝자족에 대한 탄압을 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에 더 골몰해야 할 것이다. 정부에 대한 압력은 송환된 로힝자족이 현지사회에 융합되는 방안을 제도적으로 구축하게금 하는 것이다.
민간정부가 출범한지 2년 반이 지났고, 총 임기의 절반이 흘렀다. 2020년 11월 민간정부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현재로서 NLD의 대안정당이 없고 군부에 대한 피로감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정권 교체보다 연장의 가능성이 높다. 외부에서는 정권의 국정운영 성과 측면에서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부적으로는 현재 5년의 성과보다 차기 5년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클 것이다. 특히 로힝자족을 제외한 정전협정에 성공할 경우 정부는 국민통합의 소임은 완전히 마무리했다고 선언할 것이다. 이미 로힝자족을 미얀마연방의 경계에서 지워버리는 정신적 고정관념의 고착화과정, 즉 현실을 외면하는 정부와 군부의 태도는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주권의 영속과 연방의 결속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인다. 로힝자족은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들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냥 버티거나 문제 해결에 시간을 지체함으로써 국제사회가 더 이상 로힝자족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정부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위기관리와 해결을 위한 정부의 능력 또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할 것이며 가장 중요하게 군부의 기득권은 강화될 것이다. 민간우위의 원칙은 개헌으로 완성되겠지만 민간정부에게는 군부의 군사작전이 아닌 평화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으로 로힝자족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이 요구된다. 국민을 설득하고, 로힝자족을 현지사회에 동화시키며, 국제사회와 협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민간정부에서는 더 이상 군부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정부의 노력이 성과를 거둔다면 입지가 좁아진 군부는 병영으로 복귀하지 않을까?
저자소개
장준영(koyeyint@hotmail.com)은
2009년 한국외대에서 미얀마 군부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책임연구원, 벵골만센터 연구교수 역임하고, 현재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남아와 남아시아 정치변동 및 국제관계에 관심이 있다. 주요 단행본으로 『하프와 공작새: 미얀마 현대정치 70년사』(2017), 『북벵골만 정치경제의 이해』(2017) 외 다수, 주요 논문으로 “체제변동국가의 경험과 북한의 변화: ‘미얀마 모델’의 적용 가능성.”(2018), “국가 형성 이념으로서 사회주의의 토착적 적용: 인도의 네루와 미얀마의 우 누 비교.”(2018) 외 다수이다.
[1]1989년 미얀마 정부가 국명을 변경하면서 식민시대에 붙여진 전국 지명도 미얀마어의 발음에 흡사하게 변경했다. 즉 아라칸(Arakan)이라는 용어는 식민시대의 잔존물이기 때문에 여카잉(Rakhine)으로 교체한 것이다. 일부는 영문 표기법에 근거하여 라카인 또는 라카잉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2]현지어 발음이지만 한국에서는 로마자를 한글화하는 과정에서 ‘로힝야’로 오기(誤記)되고 있다.
[3]필자가 치앙마이에서 만난 또 다른 분석가이자 독립 언론인은 레리 자건의 기사는 객관적이지 않은 사실이나 개인의 희망을 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뢰도가 매우 떨어진다는 혹평도 했다.
참고자료
- 장준영. “미얀마 보궐선거 분석: 2015 총선의 재현.” 이머릭스(Emerics). 2017/04/24.
- http://www.emerics.org/www/issue.do?action=detail&brdctsno=214594&systemcode=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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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brahim, Azeem. 2018. The Rohingyas: Inside Myanmar’s Genocide. London: C. Hurst & Co. Ltd.
- Jilani, A.F.K. 1999. The Rohingyas of Arakan: Their Quest for Justice. Dhaka: n.a.
- Nyi Nyi Kyaw. 2018. “Myanmar’s Other Muslims: The Case of the Kamam.” Ashley South and Marie Lall. eds. Citizenship in Myanmar: Ways of Being in and from Burma. Singapore: ISEAS.
- Smith, Martin. 2018. “Ethnic Politics and Citizenship in History.” Ashley South and Marie Lall. eds. Citizenship in Myanmar: Ways of Being in and from Burma. Singapore: IS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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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rrawaddy.com/news/burma/ruling-country-military-representative.html - “The President’s Office Denies Army Chief Threatened a Possible Coup.” The Irrawaddy. 2018/06/27.
https://www.irrawaddy.com/news/burma/presidents-office-denies-army-chief-threatened-possible-coup.html - Jagan, Larry. “UN Envoy Averts Possible Military Coup in Myanmar.” Bangkok Post. 20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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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rrawaddy.com/news/burma/union-govt-urged-to-halt-spread-of-aung-san-statues-in-ethnic-states.html - The European Rohingya Council. “Myanmar Military Deploys ‘Four Cuts’ Strategy againgst Rohingya Civilians.” 2017/09/04.
http://www.theerc.net/2017/09/myanmar-military-deploys-four-cuts-strategy-against-rohingya-civilians.html - Zarni Mann, “Naga Youth Oppose Aung San Statue in Sagaing.” The Irrawaddy. 2018/07/13.
https://www.irrawaddy.com/news/burma/naga-youth-oppose-aung-san-statue-sagaing.html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