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이미지
필리핀의 독재자 고(故)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9일(현지 시각) 차기 대통령에 당선됐다. ⓒ로이터연합

20년 동안 필리핀을 철권통치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64) 전 상원의원이 필리핀의 신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022년 5월 9일(현지 시각) ABS-CBN 방송에 따르면 개표가 95.8% 진행된 상황에서 비공식 집계 결과 마르코스가 3048만 표를 얻어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현 부통령(1452만 표)을 크게 앞섰다. 부통령에는 마르코스와 러닝메이트를 이룬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43) 현 다바오 시장이 3084만 표를 획득하며 2위인 프란시스 팡길리난 상원의원(905만 표)을 3배가 넘는 차이로 앞서며 당선됐다.

마르코스 당선인은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로,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지난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약 20년간 필리핀에서 장기집권과 철권통치를 이어간 인물이다. 정권을 잡은 7년 뒤인 1972년부터 1981년까지는 계엄령을 선포해 수천 명의 반대파 등 민간인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1986년 시민들이 일으킨 민주화 운동(피플 파워 레볼루션) 이후 하와이로 망명해 3년 후 사망했다.

독재자의 아들인 마르코스 당선인은 1990년대에 필리핀으로 돌아와 가문의 정치적 고향인 북부 일로코스노르테주에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에 선출됐다. 지난 2016년에는 부통령 선거에 나왔다가 이번 대선의 경쟁자였던 로브레도(57) 현 부통령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마르코스 당선인의 누나도 현재 상원의원을 지내고 있으며, 어머니는 4선 의원 출신이다. 당선인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알렉산더도 이번 선거에서 의원에 당선됐다.

마르코스 당선인은 대선 승리가 확실시된 전날 오후 11시경 선거유세본부 브리핑룸에서 연설을 통해 “국가 통합의 메시지를 지지해준 자원 봉사자와 정치 지도자들, 여러 단체들에 고마움을 전한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당선인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로, 필리핀에서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와 인지도가 높다. 두테르테 대통령 또한 집권 초부터 시민들이 이룩한 6년 단임제 헌법을 수차례 개정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독재자의 아들과 반민주적 개헌을 시도했던 현임 대통령의 딸이 나란히 대통령과 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필리핀 민주주의가 말짱도루묵이 될 위험성이 커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필리핀 정계는 마르코스의 대선 승리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사라와의 러닝메이트 구성을 꼽고 있다. 마르코스가 사라와 ‘원팀’을 이루면서 집권당인 PDP라반의 리더이자 현직 대통령인 두테르테의 정치적 영향력과 기반을 토대로 지지층을 넓히는데 성공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외에도 과거 독재 정권에서 자행된 고문과 살해 등에 대한 기억이 잊혀지고 있는 점, SNS를 통한 선거 마케팅 전략을 비롯해 자신의 애칭인 ‘봉봉’을 활용해 젊은 유권자들을 공략한 점 등이 당선에 주효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르코스의 대통령 당선으로 필리핀의 독재자 가문이 시민들에 의해 쫓겨난 뒤 36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게 된 셈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아울러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군사전략적 요충지인 필리핀의 차기 지도자가 양국 사이에서 어떤 외교 행보를 취할 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