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경쟁 사이 아세안의 고단한 생존 전략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동남아의 낭만적인 이미지 뒤에 복잡하게 전개되는 국제현실

보통 사람이 가지는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미지 중 한가지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동남아, 어딘지 모르게 느긋하고 한 박자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동남아일 것이다. 호화로운 리조트 수영장 선베드 옆 테이블에 놓인 물방울 송송 맺힌 시원한 과일주스는 아니어도 길가 작은 카페에서 더위를 피해 시원한 커피라도 한잔 놓고 앉아 있으면 시간이 멈춘 듯한 그런 동남아다. 그러나 동남아를 둘러싼 정치적 현실은 이런 낭만적이고 이국적이며 느긋한 동남아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아직까지 냉전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반도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쟁이 매일 벌어지는 곳이라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국민국가 수립이후 동남아를 둘러싼 국내 상황이나 국제관계 환경은 동남아 국가에게 한반도 만큼이나 치열한 생존을 위한 투쟁을 강요해왔다.

푸른 하늘과 바다의 낭만적인 인도양, 인도네시아 라부안 바조(Labuan Bajo)
(출처: 인도네시아 관광 공식 웹사이트)

개별 국가 국내적으로 동남아에는 국민국가 수립이후 누구나 겪는 성장통처럼 국가 통합의 문제가 있었다. 종족, 지역적으로 다양한 사회를 어떻게 통합해 낼 것인가라는 과제 앞에서 국가 엘리트들은 쉽게 권위주의적 통제와 억압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경제성장을 통한 물질적 유인으로 국가 통합의 과제를 완성하려 했던 국민국가 엘리트들의 전략은 경제성장을 지상과제로 설정해 국민들을 동원화(mobilise)했다. 이런 의도가 한계에 부딪힐 때 또 여지없이 권위주의 칼을 빼 들었다. 권위주의로 점철된 동남아 국민국가 역사는 그에 대한 반대 급부를 부르고, 몇몇 국가는 민주주의로 이행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했고, 몇몇은 그 과정에서 좌절했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이익을 본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 갈등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동남아, 그리고 1967년 이후 동남아 국가 연합체로 아세안(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을 둘러싼 국제적인 환경도 국내적 과제 못지 않게 동남아의 낭만적이고 느긋한 이미지를 배신한다. 지도를 놓고 보면 북쪽으로는 중국과 러시아, 남쪽으로는 앵글로색슨의 후손인 호주, 동쪽으로는 동북아의 일본, 서쪽으로는 인도양 너머 인도를 마주하고 있다. 여기에 태평양 건너 미국, 그리고 식민세력인 유럽까지 동남아를 둘러싼 강대국 집단을 구성한다.1) 식민시기, 냉전시기, 탈냉전 시기, 그리고 현재 미국과 중국 사이 전략 경쟁에 이르기까지 동남아는 이 지역을 둘러싼 열강 혹은 강대국 이익과 힘이 충돌하는 장이었다. 그 안에 놓인 상대적 약소국인 동남아의 삶은 고단할 수 밖에 없다.

동남아 국가들은 이런 대외적 환경 속에서 삶을 이어왔다. 고단하다고 해서 삶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남아 국가들이 어떻게 이런 환경 속에서 자신의 대외적 자율성을 지키고 확대했는지, 어떻게 주변 강대국에 대한 협상력(leverage)을 유지하고 증대시켜 왔는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런 환경 속에 어떤 전략을 발전시켜 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동남아의 생존 방식과 전략이 아세안에 대한 한국의 대외정책에 주는 함의는 무엇이 있을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 강대국 경쟁에 끼인 동남아

강대국 경쟁에 끼인 동남아라고 하면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미국과 중국 사이 전략 경쟁 사이에 끼인 동남아 국가들을 생각하기 쉽다. 더 구체적으로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자기주장 (assertivenss) 강화와 이를 봉쇄하려는 미국의 군사적 전략도 생각해볼 수 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구상하는 규칙기반질서(rule-based order)와 이에 도전하는 중국의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 등의 현상변경 시도가 동남아에서 충돌하고 있다. 공급망(supply chain) 강화라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된 미국과 중국 사이 경쟁은 사실상 서로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배타적 경제 권역을 만들고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경제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시도다. 중국, 미국과 긴밀히 연결된 동남아 국가의 경제는 뺏고 빼앗기는 미-중 사이 경제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2022년 5월 12일-13일에 진행된 아세안과 미국의 특별정상회의
(출처: 아세안 홈페이지)

미-중 경쟁의 상황이 동남아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실상 동남아에서 강대국 경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멀게는 식민지를 확장하려는 서구 열강에 의한 점탈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향신료와 후추를 찾아 동남아에 진출한 유럽 열강들의 초기 동남아 접근은 단순한 상품과 문물의 교류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점차 유럽 열강은 동남아 지역을 자신들의 모델에 따라 바꾸려 했고, 이런 시도는 본격적인 식민지배로 나타났다(Elson 2009, 18-21). 동남아에서 식민지의 확장은 두개의 전선(front)을 의미한다. 일차적으로 서구 열강의 지배와 이제 저항하는 지역 주민 사이 전선이 있다. 이차적으로는 열강, 즉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사이에 식민지 확장, 영향권 확보를 둘러싼 경쟁이 또 다른 전선을 이룬다. 동남아가 새로운 세계를 마주했을 때 이 만남은 강대국의 간섭과 경쟁의 형태로 다가왔다.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는 동남아에서 민족주의의 부상, 국민국가의 등장으로 상쇄된다. 독립을 쟁취하고 국민국가를 형성한 동남아 지역은 민족주의 열망이 식기도 전에 냉전, 미-소 대립이란 현실을 마주한다. 동북아에서 시작해 동남아까지 길게 드리운 냉전선은 동남아 지역을 미국의 영향권과 소련-중국의 영향권으로 양분했다. 소련과 중국을 배후에 두고 동남아 공산주의는 베트남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확장을 꿈꾸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자생적 공산주의 세력과 연결을 시도했다. 미국은 동남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겠다는 의도 하에 미국으로부터 지구 반대편인 동남아까지 냉전전략을 확장하고 군사력을 투사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를 모방한 동남아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SEATO)도 창설했다. 다시 동남아는 강대국 경쟁의 한 가운데 놓였다. 공산화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반대편의 태국 사이 냉전선이 쳐졌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은 태국과 함께 반공 진영을 구축했다.

1990년대 냉전의 종식은 동남아 국가들에게 낯설지만 익숙한 환경을 만들어 냈다. 미소 냉전, 강대국 경쟁이 빠진 자리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힘의 공백이란 부정적 표현은 동남아 국가들에게 강대국의 부재, 간섭의 부재라는 긍정적 환경을 의미했다. 이런 환경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중국은 빠른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일본은 중국의 성장과 영향력 확장을 우려했다. 탈냉전시기 동남아 지역에서 강대국 경쟁은 중국과 일본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놓고 벌이는 경쟁으로 정의된다. 1997-98 경제위기를 겪고 시작된 아세안+3와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라는 아세안 주도 다자협력체는 공동의 노력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 동아시아공동체 건설 플랫폼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는 장으로도 기능했다.

2021년 11월 21일 개최된 아세안-중국 외교관계 수립 30주년 기념 특별정상회의
(출처: 아세안 홈페이지)

냉전 종식 후 사실상 동남아에서 철수했던 미국은 2000년대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바빴다. 동남아 지역에서20년간 미국의 공백기에 중국은 일본을 넘어 미국 다음 자리를 차지했다. 2000년대 말 최소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존재감은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토 주장과 커지는 목소리는 단순히 중국이 경제적 대국을 넘어 동남아 국가에 직접 안보 위협을 가하는 수준에 달했다는 신호였다. 동남아의 최소한 절반은 이미 중국의 영향권에 속한다는 관찰도 이 즈음 나왔다(Wade 2010). 단순히 동남아 국가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 행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역 질서, 글로벌 질서를 새로 쓰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무성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방향을 급선회했다. 2008 글로벌 경제위기의 진원지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미국은 경제적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견제를 위해서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혹은 재균형(rebalancing)을 선언했다. 엄청난 경제적 자원을 동원해 동남아 국가들을 자신의 경제적 영향권으로 끌어 들인 중국과 잃어버린 입지를 회복하려는 미국 사이 강대국 경쟁이 시작됐다. 미국이 제공하기 어려운 경제적 지원을 중국에 의존하는 한편 중국의 잠재적 안보 위협을 미국을 동원해 해소할 수 밖에 없는 동남아 지역에 다시 한번 강대국 경쟁이 시작되었다. 막연했지만 글로벌, 지역 질서를 놓고 벌어지는 미-중 경쟁에 머지 않아 정리되리라 믿었던 기대는 사라지고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미래만 앞에 놓인 듯 하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동남아에서 미-중의 전략 경쟁은 이미 10년전에 시작된 역사이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현재이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동남아 국가들을 괴롭힐 미래이기도 하다.

아세안의 강대국에 대한 인식

동남아 국가들이 강대국에 대해 가지는 인식은 동남아의 역사적 경험과 자신의 힘이 가진 한계에 대한 인식으로 부터 나온다. 식민지배 경험은 자신보다 강한 외부 세력에 의한 재식민지화, 지역 문제와 국내 문제에 대한 간섭에 대한 강한 반감을 만들어 냈다. 개별 국가의 대외정책은 물론 아세안 차원에서 주변 강대국과 관계를 형성할 때 강대국에 의한 간섭의 배제, 주어진 환경에서 동남아 국가의 자율성 극대화는 최우선의 과제가 된다. 인도네시아 외교의 전통을 언급할 때 가장 자주 나오는 ‘적극적이고 독립적’(Aktif dan Bebas, Active and Independent) 외교는 이런 동남아의 전통을 가장 잘 표현한다. 주변 강대국에 둘러 싸여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무조건 강대국에 자신의 운명의 의탁하지 않고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전략이다. 이 인도네시아 외교의 전통은 아세안 차원으로 그대로 투영되어 아세안 대외정책, 특히 대 강대국 정책의 특성으로 드러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동남아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이념과 원칙에 매몰된 교조적(dogmatic) 태도를 가져서는 곤란하다. 이념과 원칙, 가치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요소들은 생존과 이익이 전제되어야 고려될 수 있는 항목들이다. 이런 유연한 태도는 싱가포르의 외교정책 전통에서 실용주의(pragmatism)로 표현된다. 특정 이념이나 원칙, 가치에 고정되기 보다는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 유연해야 하고 실용적이어야 한다. 싱가포르의 유명한 외교관인 토미 코(Tommy Koh)는 “싱가포르는 실용주의를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Singapore has raised pragmatism to the level of a philosophy)라고 할 정도다(Kaplan 2014, 92에서 재인용). 이런 싱가포르의 실용주의는 아세안을 타고 동남아 전체로 확산된다. 때로는 기회주의적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지만 약소국 입장에서 대외적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연루(entrapment)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런 유연성은 필수적이다.2)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현재 동남아 국가들이 강대국, 대표적으로 미국과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보면 강대국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드러난다. 2021년 말 싱가포르 소재 동남아연구소(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ISEAS)가 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자(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22). 동남아 10개국 여론주도층을 상대로 물었을 때 미국의 영향력 증가가 바람직하다는 응답(62.6%)이 중국의 영향력 증가가 바람직하다는 응답(23.6%)보다 높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경쟁 사이에 동남아가 끼어 있을 때 동남아의 대응은 “(미, 중에서 오는) 압력을 이겨 내기 위해 자체 회복력과 단결력 강화”라는 답이 46.1%다. “(미, 중이 아닌) 제3세력과의 연대”도 16.2%, “미-중 사이 중립 유지”도 26.6%다. “미-중 사이 선택을 해야 한다”는 답은 11.1%에 지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89%의 응답자가 미, 중 사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강대국 의존 전략을 거부하고 있다. 강대국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에 대한 아세안의 대응

더 직접적으로 “미국은 신뢰할 만한 전략 파트너인가”라는 질문에 42.6%가 그렇다고 답을 했지만, 그 반대 의견도 32.8%나 된다. 중국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중국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26.8%,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8.1%에 달했다. 이 여론조사로부터 2년 전인 2019년에 했던 조사에서는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에 대한 불신이 무려 47%에 달해 신뢰한다는 반응(34.9%)을 넘어선 적도 있다. 전체적으로 동남아 지역 국가들의 반응을 평가하면 중국에 비해서 미국을 보다 신뢰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상대적 우위가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서는 신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 응답이 가진 함의는 미국이 중국보다는 신뢰할 만하지만 전반적으로 강대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부분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미국과 중국에 대한 동남아국가의 인식

이정도면 동남아 국가들이 심각한 딜레마 상황에 놓여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동남아 국가들은 강대국의 간섭을 거부한다. 강대국에 대한 신뢰도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은 다르다. 상대적 약소국인 동남아 국가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 경제적 지원을 위해 마냥 강대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강대국에 자신의 안전과 경제적 미래를 마냥 맡길 수도 없다. 강대국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순간 동남아 국가들이 강대국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협상력은 거의 상실된다. 이 딜레마 속에 생존과 이익을 위해 어떻게 실용적으로 강대국을 활용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남는다. 이 과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세안 생존 전략이 된다.

아세안의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생존 전략

강대국에 대한 동남아 국가의 생존 전략은 관여(engagement)와 제약(constrainment)을 기본 요소로 한다(Ba and Kuik 2018, 236). 상대적 약소국인 동남아 국가는 강대국의 압도적 힘에 맞서 강대국을 자신의 의사대로 통제하거나 제압하기는 어렵다. 힘을 앞세우는 강대국이라면 힘에는 힘으로 맞서는 방식으로, 힘을 힘으로 제압해 위협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동남아 국가들은 위협을 제거하거나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 안아 위협에 제약을 가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강대국은 위협을 봉쇄(contain)한다면 약소국은 위협에 제약(constrain)을 가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강대국에 대해 개별적으로 혹은 아세안이란 집합적 단위에서 관여를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다. 나아가 제약을 통해 자신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강대국의 행동을 최대한 억제하여 생존을 추구한다.

관여와 제약이란 두가지 요소를 기본으로 동남아 국가의 대 강대국 전략은 서로 다른 네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현실주의(realism)에 입각한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이상주의(idealism)에 충실한 제도(institution)의 활용, 구성주의(constructivism)적 방편인 사회화(socialization) 전략, 그리고 위협을 분산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헤징(hedging) 전략이 그것이다. 물론 이 구체 전략들은 특정한 시기와 상황에 배타적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세력을 상대해야 하는 동남아 국가들은 모든 시기와 상황에 걸쳐 이 전략들을 복합적으로, 중층적으로 전개한다.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동남아의 전략으로 자주 언급되는 헤징 전략도 최근 일이 아니다. 이미 냉전기에도 동남아 혹은 아세안 나름의 냉전판 헤징 전략이 구사되었다.

현실주의적 접근

힘의 균형을 맞추는 세력균형 전략은 국가간 관계를 힘(power)에 초점을 두어 설명하는 현실주의의 가장 전형적 방법이다. 고전적 세력균형은 유럽 대륙에서 나타나는 힘의 불균형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강대국인 영국이 개입해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동남아는 독자적으로 힘의 균형 상태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대신 동남아 국가의 노력과 상관없이 형성된 강대국 세력 균형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혹은 동남아 지역에서 힘의 불균형이 나타나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협할 때 외부의 힘을 끌어 들여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미-소가 대립한 냉전 상황은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다. 두 강대국에 의해 분할된 동남아에서 개별 국가들은 자신의 진영 안에서 강대국 즉, 미국과 소련(중국)으로 부터 안전 보장과 경제적 이익을 확보한다. 반공블록 안에서 경제적 이익은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통한 경제성장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경우처럼 냉전기간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은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통해 일부 설명될 수 있다. 시각을 바꾸어 동남아 국가 입장에서 보면 냉전이 가져온 강대국 세력균형은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에 대해서 일종의 협상력을 확보한 상황이고, 이 상황을 이용해 안보 뿐만 아니라 경제적 실속을 챙겼다고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보다 최근의 일이다. 2000년대 이후 동남아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동남아 국가의 눈에 경제적 기회로 여겨졌던 중국의 부상은 점차 경제적 영향력 행사로,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와 간섭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었다. 이런 중국의 힘에 대한 균형이 필요했다. 미국 외에 중국의 힘에 대해 균형을 맞출 세력은 딱히 없었다. 냉전의 종식이후 동남아를 떠났던 미국을 다시 초대해야만 했다. 물론 아세안이나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의 동남아에 대한 재관여를 결정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세안 국가들은 중국의 부상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미국을 다시 동남아에 관여하도록 설득할 수는 있다. 미국이 이익과 동남아의 세력균형 전략이 만났고 아세안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힘의 전이가 불러온 도전에 대해서 적당한 대응책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 따라 2010년 미국을 동아시아정상회의에 포함하는 결정을 했다(Sukma 2010).

제도주의적 발상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되고 미국이 동남아에서 철수한 상황에서 동남아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동남아 국가들은 이 힘의 공백을 1967년 아세안을 만들었던 경험을 활용해 아세안 주도의 다자협력으로 메우려 했다. 1994년 만들어진 아세안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 1991년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hir Mohamad)가 제안한 동아시아경제그룹(East Asia Economic Group) 제안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아세안은 ARF에 미국, 중국, 일본, 인도, 유럽, 호주 등 아세안을 둘러싼 강한 국가들을 성공적으로 포함했다. 아세안 주도의 다자협력 제도의 창설은 아세안을 중심으로 강대국을 포함한 지역 국가들에 관여하려는 아세안의 시도였고 이는 후일 아세안중심성(ASEAN Centrality)라는 지역 내 아세안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의 출발점이다.

모든 제도들은 강하든 약하든 고유의 규칙과 규범을 가진다. 약한 규범과 규칙은 이를 위반했을 때 도덕적 비난, 평판의 악화를 초래한다. 강한 규범과 규칙은 이를 위반했을 때 처벌과 제재가 뒤따른다. 연성제도(soft institution)인 아세안이 중심이 된 제도들은 강력한 규범과 규칙을 결여한다. 하지만 약한 규범과 규칙이라도 이를 위반했을 때 비난과 평판의 악화는 피할 수 없다. 아세안은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들을 제도에 끌어들여 제도의 규범과 규칙으로 강대국의 일방적 행동을 통제하는 효과를 기대했다. 약한 규범과 규칙이라도 강대국들이 일방적 행동을 하려 할 때 이런 시도를 어느 정도 제약할 수 있다. 미국은 2009년에 와서야 아세안우호협력조약(ASEAN 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TAC)에 서명했다(Manyin 외 2009, 1-3). 오랫동안 아세안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09년까지 서명을 꺼렸다. 특별한 제재나 처벌 규정은 없지만 동남아 지역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무력 사용을 금지한 TAC의 조항이 미국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약한 제도라도 제도의 규범과 규칙이 강대국의 행동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강대국을 상대하는 아세안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외교전략

구성주의적 접근

구성주의적 설명은 인식과 인식의 변화를 통한 설명으로 객관적 측정이 어렵고 결과론적 해석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세안의 형성과 발전과정, 그리고 아세안 정체성 등장은 자주 구성주의적 설명에 의지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세안 국가들이 주변 국가들, 특히 중국과 같은 강대국에 대한 전략을 설명할 때 구성주의적 사회화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1960년대 초 말레이시아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대결정책(Konfrontasi, Confrontation)으로 요약되는 극도로 불안정한 역내 상황에서 출발해 동남아 국가들은 1967년 아세안이라는 지역협력체를 건설했다. 50년 넘는 기간 이어진 지역협력은 아세안 역내 갈등을 방지하고, 경제협력을 촉진시켰으며, 나아가 동남아 지역 국가들 사이 서로의 인식을 바꾸어 아세안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고 평가된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 적어도 아세안 5를 구성했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에게 중국은 오랫동안 명확한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위협 인식은 동남아 공산권 국가를 통해, 반공블록 내 자생적 공산주의를 통해, 그리고 중국이 직접 동남아 국가에 공산주의를 수출하려는 의도를 가진 국가라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에 기반하고 있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탈냉전 이후 중국을 직접 상대해야 했던 동남아 국가들은 오히려 중국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대화를 통해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 가진 인식을 바꾸는 사회화 과정을 거쳤다. 대화와 협력의 누적을 통해 동남아 국가는 중국에 대해 가진 인식을 바꾸고 중국은 동남아 국가에 대해 가진 인식을 바꾸어 일차적으로는 위협을 방지하고, 긴급한 위협에 대한 방지를 넘어서 중국과 협력을 통해 얻어 낼 수 있는 2차적 이익까지 염두에 두었다.

헤징 전략

마지막으로 헤징 전략은 많이 회자되는 만큼이나 오해도 많은 전략이다.3) 첫번째는 헤징 전략이 등거리 전략이나 중립 전략이라는 오해다. 헤징은 기계적 중립이나 등거리 외교가 아니다. 헤징 전략을 추구하는 국가는 분명히 자신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의 핵심을 특정 강대국에 두고 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부상하는 새 강대국을 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 혹은 불이익을 얻거나 방지하고자 새로 부상하는 강대국과도 적절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누어 담는 것처럼, 투자를 다변화해 위험을 분산하는 것 처럼, 전략적 관계를 분산, 다변화하는 위험 회피 전략이다. 두번째로 헤징전략이 최근 미-중 경쟁의 맥락에서 새로 나타난 전략은 아니다. 동남아 국가들은 이미 냉전시기 부터 일정한 헤징전략을 구사해왔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에 의해 만들어진 분할이 표면적 모습이었다면 동남아 국가들이 이 강대국 경쟁 속에서 생존을 모색했던 전략은 그 위로 몇개의 전략적 포석을 더 두었다.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동남아 국가들은 미소 각 진영에 속한 동시에 그 진영에서 벗어나려는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에 열심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이후 반공진영 국가로 구성되었던 아세안은 베트남 전후 재건에 대한 지원을 먼저 제안했다. 1969년 미국의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 이후 말레이시아, 태국은 반대진영의 중국과 국교를 맺는다. 겉보기에 강고한 냉전선을 동남아 국가들은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부지런히 넘나들었다.4) 냉전시기 헤징 전략이다.

물론 최근의 헤징 전략이 좀 더 잘 알려져 있다. 안보적으로는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함께 가져가는 전략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창이(Changi) 해군기지에 핵잠수함을 비롯한 미 해군의 자산이 정기적으로 기항하는 등 미국과 군사적 관계가 긴밀하다. 싱가포르는 1975년부터 대만과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안보적으로는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동시에 싱가포르는 중국의 일대일로, 그리고 중국이 제안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AIIB를 통해 동남아 국가들이 인프라 건설에 대한 지원을 받을 경우 금융은 싱가포르가 담당할 수 밖에 없다는 계산에서 AIIB가 싱가포르에 가져올 경제적 이익에 주목하고 있다. 더 나아가 미래에 중국이 경제적으로 동남아 지역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누릴 수 있는 이익에 올라타야 한다는 전략적 계산의 결과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동남아 국가들은 어느 국가도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으로 절대적으로 기울지 않는다. 집합적으로 아세안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개별적, 집단적 헤징의 현장이다.

싱가포르의 헤징 전략: 미국과 합동 군사훈련
(출처: 위키미디어)
싱가포르의 헤징전략: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참여
(출처: 위키미디어)
동남아의 위태로운 줄타기 동반자, 한국

동남아 국가 혹은 아세안 차원에서 마주하고 있는 전략적 환경, 특히 강대국 관계는 동남아 국가에게는 고단한 일상이다. 어느 국가 하나 동남아 국가들이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국가들에 둘러 싸여 동남아 국가들은 주어진 환경의 제약 속에서 생존과 최대한의 이익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오랜 세월 복잡한 환경 속에서 동남아 국가들은 생존과 이익을 위해 나름의 전략을 만들고 실행해왔다. 단순한 전략도 아니고 몇가지 복잡한 전략을 중층적으로 겹쳐 놓아야만 그나마 이익과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 상대적 약소국 입장에서 훨씬 강력한 국가들을 상대해 복잡한 전략을 전개하다 보면 그냥 어느 한 강대국에 편승(bandwagon) 하고픈 유혹에도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편승의 전략은 필연적으로 개별 동남아 국가의 자율성을 제약하고 외부의 강한 간섭을 동반한다. 자율성을 유지하며 생존과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동남아의 대 강대국 전략은 오늘도 위태로운 줄타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위태로운 줄타기는 국민국가 수립 이후 동남아 국가들이 늘 마주해야 했던 일상이고, 오히려 이런 위태로운 일상 속의 생존 전략은 동남아 국가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다시 한반도로 돌아와 보자. 한반도를 둘러싼 환경도 한국에 고단한 삶, 위태로운 줄타기를 강요하기는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한국이 동남아보다 좀 나을 수도 있지만, 한반도 문제는 이런 좀 더 나은 한국의 상황을 상쇄시키기 충분하다. 요컨데 동남아 국가들을 둘러싼 국제환경이나 한반도, 한국을 둘러싼 국제 환경이나 우리에게 풀기 힘든 퍼즐, 딜레마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고단한 삶이라도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금이라도 힘을 합쳐 함께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마땅히 손을 잡고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함께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할 것이다. 거창한 외교전략과 큰 그림이 아니더라도 한국은 동남아 국가와 협력할 이유가 충분하다.

저자소개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의 선임연구위원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이며 대통령직속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2012년까지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인도-태평양 지역 국제관계,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며, 비전통 안보, 오세아니아에 대한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1) 동남아 역사를 연구하는 저명한 학자 Nicholas Tarling의 2010년 저서 Southeast Asia and the Great Power의 목차는 동남아가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강대국들에 영향을 받아왔는지 잘 보여준다. 이 목차에 들어 있는 동남아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인도,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미국, 중국, 호주와 뉴질랜드 등이다. 

2) 연루(entrapment)는 강대국과 동맹을 가진 국가가 동맹 관계로 인해 원치않게 강대국간의 갈등에 끌려 들어가는 상황을 말하는데, 원칙과 가치, 이념이 유연하고 실용적 접근에 우선할 경우 상대적 약소국들은 이로 인해 생존과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원칙, 가치, 이념에 기반해 내려야 할 수도 있다. 

3) 동남아의 헤징전략에 대해서는 말레이시아의 Cheng-Chwee Kuik의 설명이 독보적이다. 그의 여러 저작중 대표적으로 (Kuik 2016)을 볼 것. 

4) 사실상 SEATO의 실패 이후 미국이 지원해 냉전 수행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오해를 받는 아세안도 초기태국과 필리핀이 미국의 동맹이라는 점이 회원국 자격 논란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미국의 영향력 혹은 냉전의 진영 논리로부터 독립적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Ba 2009, 60-62)를 볼 것.


참고문헌

  • Alice D. Ba and Cheng-Chwee Kuik. 2018. “Southeast Asia and China: Engagement and Constrainment” in Alice D. Ba and Mark Beeson eds. Contemporary Southeast Asia (3rd edition). Palgrave Mcmillan: Houndmills.
  • Alice D. Ba. 2009. [Re]Negotiating East and Southeast Asia: Region, Regionalim and the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heng-Chwee Kuik. 2016. “How Do Weaker States Hedge? Unpacking ASEAN states’ alignment behavior towards China” Journal of Contemporary China. 25:100. Pp. 500-514.
  • Geoff Wade. 2010. “ASEAN Divides” New Mandala. 23 December. (https://www.newmandala.org/asean-divides/)
  •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22. The State of Southeast Asia 2022: Survey Report.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Singapore.
  • Mark E. Manyin, Michael John Garcia and Wayne M. Morrison. 2009. “U.S. Accession to the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TAC)”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July 13. (https://sgp.fas.org/crs/row/R40583.pdf)
  • Nicholas Tarling. 2010. Southeast Asian the Great Powers. Routledge: London.
  • Rizal Sukma. 2010. “Insight: An expanded East Asia Summit should be welcomed,” The Jakarta Post. July 27. (https://www.thejakartapost.com/news/2010/07/27/insight – an -expanded- east- asia- summit- should- be-welcomed.html.)
  • Robert D. Kaplan. 2014. Asia’s Cauldron: The South China Sea and the End of A Stable Pacific. Random House: New York.
  • Robert E. Elson. 2009. “Southeast Asia and the Colonial Experience” in Mark Beeson ed. Contemporary Southeast Asia (2nd edition). Palgrave Mcmillan: Houndmil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