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3년 5월 14일 치러진 태국 총선의 결과와 이후 전개 상황을 분석하며 전례 없는 의제와 이슈들이 공론화된 태국 정치의 오늘에 대해 논의한다. 진보적 성향의 소수정당에 머물렀던 전진당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제1당으로 부상한 이번 총선의 결과는 태국 안팎으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전진당은 징병제 폐지를 포함한 군개혁과 왕실모독법 개정을 포함한 왕실 개혁을 주장하며 태국 사회의 중추적 권력에 대한 개혁의제를 공약에 과감히 배치했다. 전진당의 대범함은 총선 승리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태국 사회 기득권층의 저항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저항은 전진당의 총리 후보 피타 림짜른랏에 대한 투표 부결로 귀결되었다. 2014 쿠테타 세력이 제정하여 2017년 출범한 현행 헌법 체계에서 태국 ‘유사민주주의’의 한계는 지속될 것이다. 또한 전진당의 정치적 동지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친탁신계 프어타이당이 전진당을 배제한 연정을 주도하게 되면서 20년 넘게 지속되어 온 ‘레드 vs. 옐로우’ 색깔정치분쟁의 갈등구조도 개편 중이다. 이후 태국의 정치갈등은 더욱 계급적이고 계층적인 방식으로 체제 변화와 맞물려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유경(국제분쟁전문기자)
유사민주주의
2023년 5월 14일에 치러진 태국 총선은 태국 정치사에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75.22%라는 높은 투표율에서[1] 태국의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를 학수고대했으며 그중 다수가 정권교체를 열망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군 개혁과 왕실 개혁 등 태국 사회의 민감한 의제들을 공약의 전방에 배치한 전진당(까우끌라이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진당은 하원 500석(선거구 400석, 비례대표 100석)중 선거구 141석, 비례대표 10석으로 총 151석을 얻어 제1당이 됐다. 득표수 비율로 보면 전진당은 선거구에서 24%를 비례대표에서 36%를 얻었다. 제2당이 된 프어타이당이 선거구와 비례대표에서 각각 23%, 27%를 얻었으니 두 당의 결정적 차이는 비례대표 9%에서 나왔다. 전진당은 수도 방콕의 33개 선거구 중 동부에 위치한 랏크라방(Lat Krabang)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선거구를 모두 석권했다(The Nation, 2023/05/15). 선거가 치러진 시점에 2014년 쿠테타의 주역들이 여전히 총리와 부총리 등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총선은 ‘친(親)군정+보수+왕정주의’의 지배질서를 ‘반(反) 군정+진보+민주주의’ 질서로 순식간에 전환시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충격과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유권자 다수가 선택했던 전진당은 정부 구성도 총리 배출도 하지 못한 채, 지난 8월 22일 야당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보통의 내각제 민주주의라면 제1당 대표가 총리직에 오르는 게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태국은 달랐다. 총선 직후부터 새 정부가 출범한 8월 22일까지, 태국 정치권은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합종연횡 시나리오로 혼미했고, 총리 선출 문제로 석 달가량을 소모했다. 이 기간동안 태국 민주주의의 한계는 더욱 선명해졌다. 태국의 현행 헌법체계하에서는 민주적 선거로 다수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은 정당일지라도 전체 의회 의석의 1/3을 차지하는 임명직 상원의원들의 의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 수 있음이 재차 확인된 것이다. 엄밀히 말해 전진당은 정부 구성에 ‘실패’하거나 총리 배출에 ‘실패’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원천봉쇄 당했다’는 것이 현실을 직시한 표현일 것이다. 유권자의 선택이 존중받지 못한 것은 물론 귀족정치(aristocracy)와 결탁한 ‘유사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음을 부인키 어렵게 됐다. 이는 임명직 상원들이 선출직 총리 후보를 거부(veto)하는 ‘의회 쿠테타’의 형태로 발현됐다(The Nation, 2023/07/20).
전진당,정부구성 ‘실패’한 게 아니라 ‘원천봉쇄’ 당한 것
선거에서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둔 전진당은 곧바로 연정구성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프어타이당을 비롯하여 모두 8개 정당이 참여한 ‘전진당주도 정치동맹(이하 전진당동맹)’은 23개 합의사항을 담은 양해각서를 발표했다(Tan, 2023). 이 양해각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 점에서 전진당이 왜 결국 야당에 머물게 되었는가에 대한 포괄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전진당동맹의 23개 합의 사항 중에는 ‘헌법 다시 쓰기’가 있다(Tan, 2023). 태국의 현행 헌법은 2014년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의 통치기구인 국가평화질서평의회(National Council for Peace and Order, 이하 NCPO)가 작성한 ‘2017년 군정헌법’이다. 2015년 10월, NCPO는 21명의 친 군정 인사들을 헌법기안위원회(CDC) 위원으로 임명했고(Reuters, 2015/10/5), CDC가 기안한 헌법은 2016년 8월 찬반국민투표에 부쳐졌다(Asian Network for Free Elections, 2016). 군정 헌법에 반대하는 “Vote No” 캠페인 캠페인에 대한 탄압과 공정선거 논란 속에 헌법은 투표율 58%, 찬성 61.35%로 통과됐다. 전체 유권자의 30% 정도가 찬성한 셈이다. ‘2017 군정헌법’에는 임명직 상원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비민주적 요소가 곳곳에 배치돼 있다. 전진당이든 그 어느 당이든 태국사회 기득권 구조를 개혁하려는 정치세력은 상원의 강한 거부권에 직면하게 된다. 전진당동맹이 군정헌법을 지우고 새 헌법을 쓰는 데 합의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헌법이 존치되는 한 전진당이 정부를 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둘째, 전진당동맹은 양해각서 합의안에 왕실모독법(lèse majesté)의 개정을 담지 못했다. 태국의 왕실모독법인 형법 112조는 “국왕, 왕비, 왕세자 혹은 섭정(regent)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하거나 협박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한다. 이 조항을 어기면 3년형에서 15년형까지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왕실모독법은 인권과 표현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가치와 모순된다. 그렇다고 이 법이 입헌군주제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조항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입헌 군주제는 군주의 세습은 용인하지만 군주의 권력 행사는 합법적으로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태국의 왕실모독법은 체제 유지 보다는 왕실 성역화에 복무해 왔다. 전현 군주들의 권력 남용 사례가 있을 때면 왕실모독법은 더 빈번하고 더 강력하게 발동했다. 현재 왕실모독법에 따르면 누구든 고발장을 접수할 수 있고, 고발장이 접수되면 반드시 수사가 뒤따라야 한다.
지난 20년간 전개된 색깔 정치 분쟁 즉, ‘레드 vs. 옐로우’의 대립 시기에[2] 이 법은 비판세력에 재갈을 물리는 데 악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 쿠테타 이후에는 군정을 비판하는 활동가들에게 가차없이 남용됐다. 태국인권변호사협회(Thai Lawyers for Human Rights, TLHR)에 따르면 NCPO의 통치가 시작되고 3년 동안 왕실모독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은 138명이었으며(TLHR, 2020) 이후로도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2020년 11월 24일부터 지난 10월 27일까지 약 3년간 왕실 모독법으로 고발된 이는 259명이고 이중 20명이 18세 미만 미성년자다. 지난 2년(2021년 11월 30일 ~ 2023년 10월 31일)으로 모니터 기간을 좁혀 보면 기소율은 79%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왕실 모독법으로 고발된 이들 대부분은 민주화 시위나 정치적 의견 표출을 이유로 고발당하고 기소됐다(TLHR, 2023). 태국에서 왕실모독법 개정 요구는 여전히 불온한 시도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전진당이 이 법을 개정하겠다며 주요 공약사항에 포함시킨 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보수 왕정주의 기득권 세력들 사이에서 비상등이 켜졌다.
역설적이게도 왕실모독법 개정 공약은 전진당을 제1당으로 만든 일등 공신인 동시에 정부 구성을 봉쇄당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2020년 하반기, 금기와 침묵을 깨고 거리에서 왕실 개혁과 왕실모독법 폐지를 외쳤던 태국의 청년 세대는 2023년 총선에서 전진당에 환호했고 투표로 답했다. 이들의 투표가 전진당을 1당으로 만든 결정적 변수였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이유는 이렇다. 이번 총선에서 생애 첫 투표자는 약 300만명가량이고 전진당이 제2당 프어타이당에 앞선 득표수도 그 정도다. 선거 결과 전진당과 프어타이당은 선거구 의석 확보에서 112석으로 똑같았지만 득표수에서는 전진당이(14,438,851표) 프어타이당(10,962,522)를 347만 6,329표를 앞서 결국 전진당이 10석을 더 얻고 1당이 됐다.[3]
이러한 맥락을 토대로 하여 전진당 동맹의 유일한 총리후보였던 피타 림짜른랏(Pita Limjaroenrat)이 어떻게 저지당했는지 총리 선출 과정을 살펴보자. 태국에서 총리로 선출되려면 상하 양원 750석 중 과반이 넘는 376표 이상을 얻어야 한다. 피타는 전진당동맹으로 끌어 모은 312표보다 54표가 더 필요했다. 전진당동맹에 참여하지 않는 친군정 보수정당들에서 이 표가 나올 리 만무했다. 그래서 전진당은 자당의 총리 후보를 지지하는 게 민심임을 강조하며 상원의 표를 움직이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의회의 행보는 투표소와 거리에서 확인된 민심과 전혀 다른 방향을 향했다. 7월 13일 총리 선출 1차 투표에서 피타는 전진당 동맹의 312표 이외에 상원에서 12표 밖에 얻지 못했다(반대 182, 기권 199). 총리 선출에 필요한 376표에는 한참 못 미쳤다 (Ewe, 2023).
피타와 전진당은 2차 투표를 앞두고 자신감있는 언어로 민주적 대의를 내세우며 상원의원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했다. 그러나 2차 투표가 예정되었던 7월 19일, 의회는 1차 투표에서 총리로 선출되지 못한 피타가 다시 총리 후보로 지명될 자격이 있는지를 찬반투표에 부쳤다. 이 투표에서 상원의 다수를 포함 총 395명이 반대하면서, 태국 의회는 2차 투표 없이 피타의 총리 후보 자격을 박탈시키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태국 헌법재판소는 같은 날 피타의 의원직까지 정지시켰다. iTV의 주식을 42,000주 소유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피타가 애초에 5.14 총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판결이 날 때까지 의원직 정지를 명한 것이다. 태국 헌법 98조 3항은 언론사 지분을 소유한 이의 총선 출마를 금지하고 있다. 전진당의 전신이자 2020년 2월 21일에 강제 해산된 미래당의 타나톤 쯩룽르앙낏(Thanathorn Juangroongruangkit) 대표 역시 언론사 지분 소유 문제로 2019년 11월 20일 의원직을 상실한 바 있다(Gunia, 2020; Al Jazeera, 2019/11/20). 피타의 의원직 정지 판결에는 헌재 재판관 9명 중 7명이 찬성했다.
“태국 상원, 선거 없이 의회에 들어선 ‘군인정당’이나 마찬가지”
이처럼 유권자들이 선택한 제1당의 총리 후보가 의회에서 거부당하는 태국의 정치현실은 선관위와 헌법재판소,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상원의 성격 및 역할과 연결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관위의 경우, 선거 결과의 공식발표를 차일피일 미루다 한달여가 지난 6월 19일에야 결과를 공식화했다(Pichayada, 2023). 물론 결과 발표가 투표일로부터 60일 이내에만 이루어지면 법적으로 하자는 없다. 그럼에도 개표 결과가 나온 마당에 발표를 미루고 공식화를 주저한 건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 절차의 투명성에 불신을 자초한 격이다.
선관위는 또한 친군정 정당인 팔랑프라차랏당 의원이 제출한 피타 iTV 주식 문제 고발장을 받아들여 이를 헌재가 검토하도록 넘겨주는 ‘중개자’ 역할을 했다. 선관위는 피타 및 전진당이 최고 법원의 권위에 의해 저지당하는 길을 지속적이고 ‘합법적으로’ 터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iTV 주식 문제는 제기 내용과 시점에 억지스러운 면이 다분하다. iTV 자체가 더 이상 운영되지 않은 방송이며, 이미 피타는 2006년에 작고한 부친이 가족에게 남긴 유산의 관리를 맡았을 뿐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게다가 그는 2019년 미래당 비례대표로 선출되기 전에 이미 주식 문제를 반부패위원회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피타의 말대로라면 이 문제는 2019년에 검증이 끝났어야 옳다. 문제가 됐다면 그때 이미 피선거권과 의원자격이 없다는 판결이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이 보수정당에 의해 다시 공론화되었고 선관위는 이 문제를 헌재에 넘겼다(이유경, 2023). 그리고 헌재는 iTV 주식문제를 이유로 전진당 정부 추진에 의욕을 보이던 피타의 의원직을 정지시켰다. 선관위와 헌재의 이 같은 ‘공조’는 사실 낯선 그림이 아니다.
그동안 태국 헌법재판소는 기득권 체제의 사법적 대리자 역할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년의 정치 분쟁에서 헌재는 늘 보수왕정 엘리트의 손을 들어줬다. 2006년 쿠테타 이후 탁신계 정당을 해산하고 의원들의 정치활동을 금한 것도, 2008년 모호한 혐의로 친탁신계 솜차이 정부의 해산을 명한 것도(AFP, 2008/12/02), 2020년 미래당 강제해산도, 2019년 타나톤의 의원직 상실도 그리고 2023년 피타의 의원직 정지도 모두 정치적 갈림길에 설 때마다 헌재가 내린 판결들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진당 정부 구성과 피타 총리 선출에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거부권을 행사한 상원의 경우를 보자. 태국 출라롱콘대 정치학자 티티난 퐁수디락 교수는 2016년 군정헌법 국민투표에 앞서 상원을 일컬어 “선거 없이 의회에 들어선 군인정당이나 마찬가지”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Thitinan Pongsudhirak, 2016). 적확한 표현이다. 2017년 군정헌법 269조에 따르면 상원 250석 중 244석은 국왕의 승인을 거쳐 군부(NCPO)가 임명한다. 나머지 상원 6석은 국방부 상임장관, 3군 참모총장(Chief of Defence Forces), 육군 최고 사령관, 해군 최고 사령관, 공군 최고 사령관, 태국 경찰청장 등 6명의 군경 고위직들이 당연직으로 차지한다.
그렇게 임명직과 군경 고위직으로 구성된 250명의 상원들은 선출직인 하원과 마찬가지로 총리 선출시 1인 1표를 행사한다. 임명직 상원에게 총리 투표권을 부여하는 문제는 2017년 군정헌법 찬반여부와 함께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군부임명 상원의원들이 총리 투표권을 가져도 좋은가?’라는 부가 질문에 유권자의 58%가 찬성했다는 게 당시 군정의 발표였다. 상원은 태국 ‘유사민주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집단이다. 태국 헌법은 상원의원 자격의 하나로 ‘정치적 중립’을 적시하지만, 누구보다 정치적인 태국 군수뇌부가 선택한 친군정 보수성향 인사들에게 정치적 중립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태국의 상원은 군대 및 왕실 권력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태국에 ‘상원’ 개념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46년 프리디 바놈용(Pridi Banomyong) 총리 시절이었다. 프리디는 1932년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시암혁명 지도자로, 그가 제시한 상원은 간접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치집단’ 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7년 11월 7일, 시암쿠테타로 피분송크람(Phibunsongkhram)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왕이 임명하는 상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피분송크람 정권은 절대왕정의 전통을 상당부분 부활시켰고 이듬해인 1948년에 제정된 헌법은 입헌군주제 도입 이래 가장 왕정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헌법으로 평가받았다. ’국가, 종교(불교), 왕실’ 등 태국의 지배구조를 떠받드는 ‘3대 기둥’ 만트라는 바로 피분송크람 시대가 만들어낸 지배 이데올로기다. 그리고 보수 왕정주의 엘리트는 상원을 통해 의회 안에서 귀족정치의 전통을 이어갔다.
국왕의 상원임명 체계는 1997년(제18대) 헌법에 따라 변화를 겪게 된다. 태국 역사에서 가장 민주적이라 평가받으며 “시민의 헌법(People’s Constitution)”으로 불렸던 이 헌법은 상하양원을 모두 100% 선출직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2006년 9월 19일 군사쿠테타로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정부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군정통치기구 <국가안보평의회>(‘CNS’, Council of National Security)는 이듬해인 2007년 군정헌법(제19대 헌법)을 통해 상원의원 50%만 선출직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50%는 헌재소장, 선관위 위원장 등이 참여하는 <상원선정위원회>가 선정하는 방식의 임명직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2014년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정부를 무너뜨린 군사쿠테타 이후 ‘임명직 상원’은 온전히 부활했다. 2017년 군정헌법은 상원 250석을 모두 임명직으로 전환했다. 10년전 군정헌법과 다른 점은 상원의원을 군이 임명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에게 전례없던 총리투표권까지 부여하면서 의회에는 선출되지 않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탄생했다.
상원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전진당의 시도
전진당은 1차 투표로 피타가 총리직을 저지당하자 상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상원의 총리투표권을 박탈하는 헌법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문제는 이 개정안조차 상원의 거부권 행사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현행 헌법 256조는 헌법 개정시 상하양원 의회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이중 상원의원이 최소 1/3을 차지해야 한다. 즉 상원에서 83명 이상이 지지해야 헌법 개정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상원의 동의 없이는 헌법 조항 하나 개정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상원을 임명직에서 선출직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은 이미 10년 전 시도된 바 있다. 2013년 4월, 당시 친탁신계 잉락 친나왓 정부와 집권 프어타이당은 임명직이 50%를 차지하는 상원을 100% 선출직으로 되돌리는 헌법 개정안을 추진하며 하원에서 우선 통과시켰다(Bloomberg, 2013/04/04) 그러자 이에 반발한 임명직 상원의원들이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청구했고 그해 11월 헌재는 집권 프어타이당의 상원 관련 헌법 개정 시도를 “반헌법적”이라고 판결했다(BBC, 2013/11/20). 잉락 정부는 탁신을 포함하여 정치분쟁 과정에서 기소된 정치인들과 정치범들을 사면하는 법안도 추진했으나(Al Jazeera. 2013/11/01) 이 또한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보수왕정주의 <민중민주개혁위원회>(PDRC, People’s Democracy Reform Committee)를 지지하는 ‘옐로우 셔츠’ 시위대는 즉각 방콕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상원의원의 선출직 전환은 보수 왕정세력이 용납하기 어려운 제안이었으며, PDRC 시위대는 공공연히 군의 개입을 요구했다. 그리고 2014년 5월 22일, 프라윳 장군(Prayut Chan-o-cha)과 프라윗 장군(Prawit Wongsuwan)이 주도한 군사 쿠테타가 발발했다. 프라윳을 총리로 하는 군사정부가 2017년에 제정한 헌법은 전원 군부에 의해 임명되는 상원의원에게 총리 선출권뿐만 아니라 헌법개정안에 대한 사실상의 거부권까지 부여하며 상원을 무소불위의 권력집단으로 만들었다.
이쯤 되면 태국은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 제1당이 되는 과정과, 총리를 배출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이 별개로 분리된 국가로 볼 수 있다. 2023년 5.14 총선 후 상원은 피타와 관련된 논란을 부각시키며 ‘피타 총리후보 검증위원회’를 구성했을 만큼 전진당 집권가능성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피타에게 ‘반기득권(anti-establishment)’ 성향이 있는지도 확인하겠다는 것이 검증위원회의 입장이었다(Thai PBS, 2023/05/18). 전진당과 피타를 “검증”하는 것과 관련해서 선관위와 헌재와 상원은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전진당 정부’ 저지,프어타이당에 넘어온 주도권
전진당의 후보가 총리로 선출되는 것을 저지하고 전진당을 고립시키는 전략은, 연정구성의 주도권이 제2당인 프어타이당에게 넘어간 후에도 계속됐다. 군정의 후신정당들과 보수정치권은 ‘프어타이 연정’에 전진당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예컨대 7월 22일 팔랑프라차랏당, 루엄타이쌍찻당, 붐자타이당, 찻타이파타나당 등 4개 정당은 “전진당이 있는 한 프어타이 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Bangkok Post, 2023/07/22). 민주당 정부의 부총리였다가 프라윳의 신당인 루엄타이쌍찻당으로 이적한 트라이롱 수완키리(Trairong Suwankiri)는 5월 12일 방콕 선거 유세장에서 ‘태국판 이념논쟁’을 들고 나왔다. 태국의 진정한 적은 국가(Nation), 종교(불교, Religion), 그리고 왕실(Monarchy)을 존중하지 않는 태국인들이라고 맹비난 한 것이다. 비난의 대상이 전진당임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Ricks, 2023). 같은 시기에 프어타이당 역시 모호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프어타이당이 군정 후신정당들과 협력할 수도 있다는 소문은 선거 이전부터 있었으며, 이러한 의혹은 프어타이가 선거에서 전진당에 뒤처진 이유이기도 하다.
프어타이당은 반군정 입지를 오래 유지했지만, 한 번도 왕실개혁이나 왕실모독법 개정을 당의 의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프어타이당은 태국사회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절차적 선거민주주의에 충실하며 보수진영과도 타협할 수 있는 색채의 정치세력이지만, 오랫동안 제도권 정당들 사이에서 범민주 캠프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제 유사민주주의 체제를 정면에서 꼬집고 군과 왕실을 개혁하겠다는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나타난 이상, 태국의 지배 엘리트는 프어타이당을 저지하는 대신 전진당을 제압할 효과적 도구이자 동맹세력으로 삼아야 했다. 마침 프어타이당은 망명한 탁신 전 총리의 귀국을 추진하면서 더욱 타협적이고 유연해질 기회를 잡았다.
8월 22일, 결국 프어타이당은 총리 선출에 필요한 마법의 숫자 ‘376′을 만들기 위해 전진당은 제외하고 군정 후신정당들은 참여하는 연정을 발표하며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비록 탁신 가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선거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하며 서민층에 호소력 있는 정책으로 범민주진영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모았던 특유의 대중정치에는 돌이키기 어려운 흠집이 났다. ‘전진당-프어타이당’의 강력한 연대로 반군정 정부가 출범하기 바랬던 유권자들의 열망을 뒤로한 채, 프어타이당은 자신들이 20년 넘게 싸운 군정의 후신정당들과 타협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였고, 당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손상 받았다.
이로써 태국 정치분쟁의 구도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태국정치의 갈등은 ‘왕당파(귀족정치) 대 개혁파(민주정치)’의 구도로 신-구 엘리트 세력이 충돌하는 “횡(橫)”의 모순을 하나의 축으로 하고, 계층과 계급 갈등이라는 ‘종(縱)’의 모순을 또 다른 축으로 하여 십자모양으로 얽히며 역동적으로 분출됐다(이유경, 2020/12/05). 이제 횡의 모순의 주체였던 신-구 엘리트 세력이 타협하여 연정을 구성하면서 횡의 모순은 약화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이후 지속됐던 ‘레드 vs. 옐로우’ 대결 구도 역시 한층 약화될 것이다(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대신 계층과 체제를 변수로 한 종의 분쟁은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진당의 개혁노선이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계속해서 좌절당할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저자소개
이유경(lee@penseur21.com)은
국제분쟁전문기자다. 2004년부터 아시아 분쟁 이슈를 집중 취재하고 <시사인>, <한겨레21>, <한국일보>, <neues deutschland>(독일) 등에 기고하였다. 2013년 제1회 <리영희 재단> 취재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어 <버마: 개혁과 민주화 이행기에 직면한 도전들>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한국민주주의 연구소>의 2021년 학술펠로우로 위촉되어 “연방민주주의를 향한 미얀마의 여정과 도전”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저서 및 역서로는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인물과 사상사, 2007), 『누가 무장단체를 만드는가』(현암사, 201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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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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