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혼을 금지해 온 필리핀에서 ‘이혼 합법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가정 폭력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끝낼 수 있는 길이 열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여성·인권 단체는 환호하고 있다. 다만 보수 성향 상원 문턱이 높아 실제 ‘이혼할 권리’ 확보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26일 필리핀 PNA통신 등에 따르면 필리핀 하원은 23일 찬성 131표, 반대 109표, 기권 20표로 이혼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에는 결혼 생활이 배우자의 학대, 불륜, 치유할 수 없는 갈등 등으로 파탄에 이르렀을 경우 이혼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인구 80%가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은 이혼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부부가 법적으로 완전히 갈라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혼인무효 판결이다. 하지만 소송 비용이 15만~30만 페소(약 352만~705만 원) 수준으로, 월평균 소득(약 40만 원)의 9~16배가량 드는 데다 판결을 받는 데 수년이 걸려 서민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간 필리핀 여성들은 원치 않는 결혼이나 배우자의 폭력에도 쉽게 부부의 연을 끊지 못했다.
이혼법이 입법화 5부 능선을 넘으면서 여성단체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로비단체 ‘필리핀을 위한 이혼’은 “여성이 학대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한 결정”이라며 “오는 8월 상원에서도 법안이 통과할 수 있도록 투쟁을 이어 나가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역시 이혼 합법화를 크게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보수 성향 상원과 가톨릭 교회가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상원 통과까지는 난항이 예상된다. 하원의 결정에 필리핀 가톨릭 주교회는 ‘결혼과 가족 유지 의무를 배반하는 결정’이라고 반발했다. 제롬 세실라노 필리핀 가톨릭 주교회 공보관은 마닐라타임스에 “이혼은 폭력적인 결혼 생활의 해결책이 아니다”라며 “차라리 가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억제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2018년에도 이혼 합법화 법안이 사상 처음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의 반대로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당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도 “이혼법이 상원을 통과해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며 공개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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