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미(동남아센터 공동연구원, 덕성여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파푸아 섬은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그 섬은 중앙에 남북으로 그어진 국경에 의해 동서로 나뉘어 있다. 서쪽은 인도네시아령 서파푸아이고, 동쪽은 파푸아 뉴기니이다. 이 섬은 인류학자들에게는 꿈의 섬이다. 필자가 인류학 공부를 시작한 이래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도 바로 이 파푸아 섬이었다. 벌거벗은 검은 피부의 원주민들이 꼬떼까(koteka)만 찬 채 전쟁을 하고 돼지축제를 벌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어느 인류학자의 심장이 뛰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약간의 수입을 올리고 있던 그 첫 해 여름방학에 나는 더 기다릴 수 없어 내 꿈의 섬으로 날아가고야 말았다. 아들 녀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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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파푸아 섬의 돼지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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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필자의 아들과 꼬떼까를 찬 원주민들 – 원주민들이 손님에 대한  환영인사도 없이 사진을 찍으려면 한 모델 당 2천 루피아씩 요금을 내라고 사무적으로 요구하자 인도네시아인들의 친절함을 익히 알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어에도 능통한 아들은 심하게 화를 내었고, 사진 촬영을 거부하였다. 당시 그 마을에서 아들과 필자는 유일한 손님이었다. 이에 멀리까지 온 김에 사진 한 컷은 남겨야 한다는 필자의 강요에 아들은 어쩔 수 없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사진 촬영에 응하였다. 오지까지 와서 돈 맛 들인 사람을 만나는 씁쓸함을 곱씹으며.

그 여행의 가장 진한 추억은 당20130510210114_14197연 꼬떼까에 관한 것이다. 꼬떼까란 깔때기 모양을 한 조롱박 같은 식물을 모닥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후 그 속살을 제거하고 껍질만 남겨 만든, 서파푸아 남성들의 성기에 씌우는 물건이다. 한번 그렇게 마련한 꼬떼까의 수명은 대략 3개월이라 한다. 그것이 옷일지 아니면 단순 악세사리일지는 아직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첫 모습은 분명 벌거벗은 몸일 것인데, 하필이면 벌거벗은 몸에 남성의 상징 부분을, 그것도 크게 과장되고 하늘로 치솟은 모습의 깔때기로 가리는 꼴이니 (파푸아 원주민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정말 “볼 만한” 풍경이 되는 것이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석기시대를 살던 사람들이며 미국의 록펠러 부통령의 막내아들까지도 희생시킨 식인종들이 바로 서파푸아 사람이라는 풍문을, 일반인들에게 가시적으로 확신시키는 물증이 꼬떼까이기도 하다(좌측 <사진 3> 꼬떼까를 차고 은행에 간 원주민. 와메나 지역).

서파푸아의 풍부한 광물자원들과 광활한 땅덩어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1969년 공식적으로 서파푸아를 합병하게 된 인도네시아 국가에게 있어 서파푸아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문화와 관습은 심각한 딜레마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석기시대를 살고 있었고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던 지역의 원주민들을 현대국가 인도네시아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일이란 어렵기도 할 뿐더러 때로는 바깥 “문명인들의 시선”때문에라도 서파푸아인들이 자신들과 한 동포임을 인정하기가 곤욕스런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합병 이래 인도네시아 정부가 서파푸아에 대해 취한 첫 정책은 이 “흉물스런” 꼬떼까를 벗겨버리고 문명인답게 반바지를 입히는 일이었다. 이 정책을 인도네시아 일반인들은 꼬떼까 작전(operasi koteka)이라고 부른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서파푸아 주민들에게 반바지를 공수해다 보급했으며, 자기 관할 지역에서 원주민들이 꼬떼까를 벗어버리고 반바지를 상용하게 되는 성공률에 따라 그 지역 행정관료의 능력이 평가되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 작전에 대해서는 저항이 뒤따랐다. 오랜 세월의 관습과 습관을 버리는 것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옷을 입는다는 것에 뒤따르기 마련인 문명인의 관행과 제도가 이들 원주민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우선은 세탁 관념이 없어 지속적으로 반바지를 착용한 결과 피부병이 돌기 시작했고, 세탁비누를 구입하기에도 반바지를 구입하기에도 현금이 없었던 것이다.

정부의 고민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바지 착용률이 미미한 가운데 드디어는 전 세계인의 토픽감이 되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즉, 인도네시아 정부는 1973년 초 미국 국적의 여성 윈 사전트(Wyn Sargent)의 만료된 비자를 연장해 주지 않고 추방하였다. 이 여성은 서파푸아에서도 가장 벽지라고 할 수 있는 와메나(Wamena) 지역 인근에서 원주민 역량강화사업을 펼치던 작가이자 사진작가였는데, 이 여성이 그 지역의 용맹스럽고 영향력 있는 한 족장의 여섯 번째 아내로 혼인식을 올렸고, 그 혼인의 의도는 원시인의 성생활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를 위한 것으로 자카르타 중앙 일간지가 보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족장과 윈 여사 간에 실제 성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엇갈리지마는, 이 선정적인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 실은 꼬떼까 작전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즉, 당시 이 지역의 행정관료는 자바 섬 서부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관할지역 주민들이 얼마나 정부의 반바지 입기 정책에 호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회활동가인 이 백인 여성의 역할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관료는 윈 여사에게 혼인 사실을 국가기관에 신고해야 하므로 족장과 족장의 기존 아내 5명과 함께 자신의 행정관서로 출두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 이유는 일부다처제를 하기 위해선 기존 아내들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요청에 덧붙여서 이 관료는 윈 여사에게 다른 아내 5명 모두에게 반바지를 입혀 올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윈 여사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어서 말다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인근에서 존경받는 한 백인 여성을 통해 자신의 행정 능력을 자카르타에 입증하고자 했던 것이 좌절된 데에 대한 앙심과 자카르타의 유력자들과 안면이 있는 윈 여사가 혹시라도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중앙에 알릴까 걱정한 이 관료는 오히려 선수를 쳐서 자카르타 일간지에 원시인의 성생활을 연구하려는 의도로 족장과 혼인한 백인 여성이 있다는 제보를 하였다. 더구나 자카르타 유력자들의 귀에 거슬렸을 법한 또 다른 사실은 윈 여사가 혼인 후 스스로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서파푸아의 여성들처럼 풀치마만 걸치는, 말하자면 꼬떼까 작전의 방향과는 완전 반대되는 선택을 했다는 정보였다. 결국 인도네시아 전역의 여론이 악화된 결과, 윈 여사는 추방을 당하게 된다. 현대국민국가 건설의 책무를 진 인도네시아 국가에게 있어서 꼬떼까는 원시의 상징, 저개발의  상징이자 어서 타파해야 할 남부끄러운 구습일 뿐이었고, 꼬떼까 작전에 반하는 행동은 국가적 사업에 대한 저항과 모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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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술라웨시 섬 마까사르 지역에서 유학 중인 서파푸아 청년들이 데모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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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서파푸아 도시 자야뿌라에서 벌어진 데모 풍경

비록 처음 꽤 오랜 시기 동안 정부의 꼬떼까 작전은 문화적 저항에 당면했었지만, 꼬떼까 작전이 시행된 지 4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오히려 꼬떼까를 착용한 사람이 드문 편이다. 꼬떼까를 상용하는 사람을 보려면 윈 여사가 봉사했던 와메나 인근의 벽지로 가야 한다. 그 곳에도 실은 옷 입은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비록 상용하는 꼬떼까는 줄어들었지만, 서파푸아인들의 정체성과 결집의 상징으로서 꼬떼까가 현재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긴 역사적으로 서로 고립되어 살아왔던, 언어마저도 서로 다른, 서파푸아 내 250여 종족들 간에 쉽게 발견되는 공동의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꼬떼까였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내부 식민지적 상황에 신음하던 서파푸아에 민주화 및 독립의 호기가 찾아왔던 2000년도에 개최된 서파푸아민족대회 당시, 꼬떼까만 걸치고 단상 위에서 웅변을 토하던 어느 종족 대표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신들의 고향 땅뿐 아니라 멀리 다른 섬에서조차도 서파푸아의 민주화와 인권보호를 외치기 위해 데모꾼들은 꼬떼까를 착용하고 나선다.

그런데 꼬떼까가 딜레마를 선사하는 물건이기는, 인도네시아 국가에게나 현지 원주민에게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인도네시아로의 병합 이후 태어난 세대에겐 더욱 그러하다. 관광객을 의식해서, 혹은 자신들의 마을에 경사가 있거나 서파푸아 전체의 운명이 걸린 행사를 벌일 때, 서파푸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결속력을 보이기 위해 전통 복장을 하고, 당연히 꼬떼까를 차고 나선다. 여성의 경우에도 상의 없이 풀치마를 입는다. 그러나 이들은 행사장 들어가기 전까진 무언가 자신들의 벗은 몸을 가려줄 것을 걸치고 있다. 여성의 경우엔 가슴을 가릴 수 있는 쇼올 종류를 어깨에 걸치고, 남성들은 노켄(noken)이라는, 식물섬유를 뽑아 엮어 만든, 과하게 치렁치렁 늘어지는 가방을 어깨에서부터 등을 지나 엉덩이까지 가릴 수 있도록 머리에 맨다. 혹은 벗은 몸에 칠을 해서 착시를 주거나 활통을 부산하게 움직여서 벗은 몸을 가리려 한다.

한편 꼬떼까도 진화(?)하고 있다. 꼬떼까에서 반바지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꼬떼까 자체가 혁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관광객이 쥐어주는 지폐를 보관할 곳이 벗은 몸에는 없다. 그래서 꼬떼까의 맨 위 끄트머리를 살짝 잘라 구멍을 내고 그 구멍 속에 지폐를 도르르 말아서 집어넣으면 훌륭한 지갑이 된다.또 기껏해야 3개월밖에 착용 못하는 약한 재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문명세계에서 온 플라스틱 파이프도 훌륭한 꼬떼까의 재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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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꼬떼까의 혁신. 플라스틱 파이프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꼬떼까는 원시와 문명, 혹은 인도네시아의 패권과 서파푸아의 정체성 구도로만 읽히는 딜레마는 아니다. 필자는 몇 년 전 서파푸아에서의 국가폭력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꼬떼까를 검색어로 하여 검색한 결과가, 서로가 남의 등짝만 바라보는 서늘한 인간사의 모습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꼬떼까의 검색 결과가 안내하는 웹사이트는 크게 포르노 사이트이거나 혹은 서파푸아의 독립투쟁을 홍보하는 사이트였다. 내게는 자존심이고 내 정체성의 정수인데,남의 눈에는 고작 포르노였다는 것을 서파푸아의 원주민들은 과연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