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미(동남아센터 공동연구원, 덕성여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인간이 사회를 통제하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시켜 온 방법은 다양하다. 법과 제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문화적 관행들이 사회 통제와 분쟁 해결을 위해 기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중 하나가 초자연적 존재를 통하는 것일 수 있겠는데, 최근 인도네시아 정치무대에서 초월적 존재에 의존한 자기저주(self-curse) 방식이 사회 통제와 분쟁 해결 방식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어 흥미롭다.

그것은 “뽀쫑(pocong)의 맹세”라는 것이다. 뽀쫑이란 사람의 시신이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의 모습이다.이불 호청처럼 넓은 흰색 천으로 시신을 둘둘 감싼 후에 머리끝과 발끝 부분의 천을 사탕 모양으로 꽁꽁 동여 맨 모습이 뽀쫑인 것이다. 그러므로 뽀쫑의 맹세란 뽀종의 모습으로 행하는 맹세이다. 이슬람 사원에 가서 뽀쫑의 모습을 한 채 이슬람 종교지도자의 주관 하에 많은 증인들을 불러놓고 “신이시여, 저의 진실은 이러이러합니다, 제 말이 거짓이라면 당신의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맹세하는 것이다. 이슬람 성전인 코란까지 머리맡에 두고 한 맹세이니, 만일 그 맹세가 거짓이라면 그는 신의 노여움을 사 죽음에 이를 것인데, 마침 뽀쫑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바로 땅 속에 묻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상위 <사진1> 뽀쫑의 맹세 광경. 아들이 자신의 병을 아버지의 주술 탓이라 주장하자 두 부자의 엇갈리는 주장에 대한 진실을 가리기 위해 뽀쫑의 맹세가 시행되었다).

뽀쫑의 맹세는 정통 이슬람의 전통에는 없는 것이지만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신자들 간에는 자신이 어떤 혐의를 받게 된 경우 그리고 그 혐의를 부정할 만한 어떠한 물리적 증거도 제시할 수 없는 경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 맹세를 거행한다. 혹은 분쟁 당사자 쌍방이 누구의 주장이 진실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행한다. 흔히 주술적 혐의, 부채관계, 그리고 배우자의 부정행위 등이 뽀쫑의 맹세를 통해 해결되는 사안들이다. 예를 들어 주술을 걸어 이웃과 친지를 아프게 했다는 혐의를 받는 사람이 있다 치자. 그에게로 겨눠진 주술 혐의의 근거라고는, 아픈 사람의 꿈속에 그가 나타난 이후 병세가 시작되었다는 것뿐인데, 이런 경우 자신이 주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단이 없으므로, 위대한 신 앞에 죽음을 불사한 맹세를 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입증한다. 인도네시아를 30여 년간 철권 통치해 온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막내아들 토미 수하르토(Tommy Suharto)조차도 아내와의 가사 분쟁 도중 아내가 재산을 빼돌리고 혼외 관계를 가졌었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아내가 반박하자 둘이서 동시에 뽀쫑의 맹세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하였었다.

전통 촌락공동체 사회에서 주술적 혐의나 부채관계 그리고 배우자의 부정행위는 자칫 군중재판식의 폭력사건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행위는 국가법에 호소하기 이전에 이미 촌락공동체의 안위와 도덕성을 실제적으로 위협하는 심각한 사안으로 간주되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 뽀쫑의 맹세는 그 분쟁해결기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발휘한다. 공동체 모두가 믿고 있는 초월적 권위에 기대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맹세를 한 자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도 없을 뿐더러 만일 그 맹세가 거짓이었더라도 정의로운 신께서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정의구현 열망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폭력사태를 방지하는 효과까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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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부정부패 척결위원회에서의 뽀쫑 시위대. 부정부패 사범은 뽀쫑의 맹세를 하라고 푯말에 쓰여 있다.

민간에서 널리 시행되어 오기는 했지만 어찌 보면 미신적이기도 하고 비이성적 행동이라 치부될 수도 있는 이러한 관행이 최근 인도네시아의 중앙 정치 무대에서 빈번하게 거론되고 있다. 시민들이 공직자와 부정부패사범 들에게 뽀쫑의 맹세를 요구하는가 하면, 국가 최고의 지성인들과 권력자들까지도 정치적,사법적 사안을 놓고 자신들의 주장이 진실임을 웅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뽀쫑의 맹세를 제안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인도네시아 정국의 주요 이슈인 다양한 부정부패 스캔들과 부정부패척결위원회의 활동 과정에서 특히 그러하다.

인도네시아는 2003년 부정부패척결위원회(Komisi Pemberantasan Korupsi)를 구성하고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한 바 있다. 그리하여 부정부패척결위원회는 지방과 중앙을 가리지 않고 각종 국책사업과 직무상의 권한을 이용해 이권을 챙기려 한 관료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해오고 있는데, 문제는 부정부패사범들이 위원회가 제기하는 혐의점에 대하여 이런저런 거짓 변명들을 늘어놓으며 수사에 협조하지 않거나 오히려 권모술수를 이용해 위원회의 사법처리 과정을 방해하는데다가, 위원회 스스로도 그 사법처리 방법이나 속도가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뻔뻔스레 혐의를 부인하거나 수사를 방해하는 부정부패사범에 대한 혐오와, 법집행도 제때제때 못하는 위원회에 대한 실망은 결국 국가의 부정부패 척결 의지에 대한 의심과 국가의 사법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귀결되었고, 이에 초월적 존재에 의지해서라도 부정부패의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소망이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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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부정부패 척결위원회 앞에서의 뽀쫑 퍼포먼스. 뽀쫑이 부정부패사범과 장기를 두고 있다.

그래서인가, 최근 언제부터인가 이들 부정부패사범들에게 믿지 못할 변명 대신 뽀쫑의 맹세를 행하라는 주문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 예로  2012년 3월 21일 자카르타의 부정부패척결위원회 앞마당에서는 부정부패사범들에게 뽀쫑의 맹세를 요구하는 시위와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이 날 시위대는 뽀쫑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뽀쫑이 부정부패사범과 장기를 두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부정부패사범이 거짓 증언을 일삼는 것은 감히 전지전능하신 초월적 권위와 게임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상징적 퍼포먼스일 법하다.

한편 부정부패사범도 뽀쫑의 맹세 운운에 열성이다. 2012년 당시 부정부패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던, 인도네시아의 여당인 민주당(Partai Demokrat)의 재정담당 나자루딘(Nazaruddin)은 자신의 사건에 민주당의 대표 아나스 우르바닝룸(Anas Urbaningrum)도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을 아나스 우르바닝룸이 반박하자, 아예 둘이서 뽀쫑의 맹세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 놓은 상태이다. 이 이외에도 부패 혐의자들 중에 뽀쫑의 맹세라도 하겠다며 결백을 주장하는 이는 더 있다.

부정부패척결위원회의 활동과 관련하여 관료와 정치인들 간에 뽀쫑의 맹세 공방도 매우 잦아졌다. 동남아 체육대회 선수촌 건설 관련 수뢰 혐의를 받고 있던 여당 관계자와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부총재 인준을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뇌물을 공여한 혐의가 있는 인물에 대한 구속 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고, 또한 수뢰 혐의로 해외도피 중인 자를 부정부패척결위원회 고위인사가 은밀히 접촉했던 사실 들이 밝혀짐에 따라, 부정부패척결위원회 활동의 진정성에 대한 시민사회의 의구심은 증폭되었고, 이에 부정부패척결위원회의 장이 뽀쫑의 맹세라도 할 수 있다면서 위원회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부정부패사범에 대한 사법처리를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발언한 바 있다. 또한 이에 대하여 현 국회의장은 정말 뽀쫑의 맹세라도 하라고 거듭 요구하였다.

부정부패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는 사법기관이 무능하니 뽀쫑의 맹세가 더 효과적이고 믿음직스럽다는 말인가? 시민단체, 부정부패사범 그리고 관료 및 정치인들까지 모두 합세해서 뽀쫑의 맹세를 통해 진실을 밝히자고 그리도 빈번히 언급을 하였건만, 실상은 그 누구도 실제로 뽀쫑의 맹세를 실천했다는 소식을 필자는 아직 접해 본 적이 없다. 국가의 사법제도와 부정부패 척결 의지에 대한 국민적 실망은 이제 국가적 법제와 합리적 이성 대신 민간의 지식 체계와 인식의 틀 속에서나 기능하던 뽀쫑의 맹세까지도 동원하고자 할 만큼 절박한 순간까지 와 있는데, 국가의 중심부에서 교육과 부를 독점한 엘리트들은 국가의 법제를 잘 운용하여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오히려 초월적 존재에 의지한 정의 구현 방식인 뽀쫑의 맹세까지도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소통을 위한 수사학 정도로만 동원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국가의 법제도를 통한 정의 구현 책무에 실패한 국가 엘리트들이 오히려 신에 의한 궁극적 정의마저도 수사학으로 우롱하고 있는 이 현실에 민의가 어떻게 대응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 이 글은 2012년 서남포럼 뉴스레터의 심층분석 아시아 코너에 게재되었던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