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4일, 인도네시아의 국가인권위원회는 수하르토 치하였던 1982년에서 1985년 사이 발생했던 페트루스(Petrus) 사건에 대한 만 4년간의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마감하고 그 조사결과보고서를 발표하였다(상단 그림1. 조사결과보고서 발표현장).
페트루스 사건은 당시 인도네시아 군부가 민생치안 확보를 위해 절도범, 갈취범, 강도, 깡패, 불량배 등 각종 치안사범들을 납치, 감금, 살해한 사건이다. 워낙 공식적 사법절차를 따르지 않은 조치였고 그 방법조차 납치, 암살이었기 때문에 그 피해 규모를 가늠하기는 힘들어, 적게는 수백 명으로부터 많게는 1만 명까지 그 피해자를 추산해왔었는데, 이번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결과, 법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피해자는 피살자 167명, 실종자 23명, 감금피해자 68명과 고문피해자 14명이 전부라고 한다. 그리고이번 보고서는, 이제까지 인도네시아 국민과 관측통들이 추측해 온대로, 역시 당시의 군부가 이 암살단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영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림2> 페트루스 작전에 의해 암살되었다가 발견된 피해자 시신
<그림3> 페트루스 작전에 의해 암살된 피해자의 묘를 인권위 조사관들이 방문하였다. 맨 오른쪽 사람은 페트루스 작전에 의해 납치 감금되었다가 풀려나 생존한 또 다른 피해자이다.
<그림4> 1982년 총선당시 소요가 발생했던 자카르타의 라빵안 반뗑 모습
그런데 실은 이 인물이야말로 과거 수하르토의 집권 여당이었던 골카르 정당과 유착관계에 있던 전과자 조직의 우두머리였고, 더구나 본인 스스로도 고백한 바와 같이, 1982년 인도네시아 총선 당시 자카르타의 라빵안 반뗑(Lapangan Banteng)에서 선거소요를 조직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1982년 총선 이후 집권 여당에 의해 그 효용을 다하고 제거당할 즈음에 페트루스 작전이 펼쳐지자 암살 위협을 피해 15년 동안이나 도망가 숨어살다가 수하르토 하야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에겐 현재 중앙과 지방의 정치인으로 활약중인 아들들이 있고, 막내딸은 인권운동가이다. 필자가 전화로, 그리고 직접 만나 그들을 면담한 바 있는데, 바띠와 그의 인권운동가 딸은 결코 과거 정치깡패로서의 바띠의 범죄행각에 대한 참회와 사법적 처벌 감수 여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무자비한 국가폭력의 피해자, 인권 침해의 피해자로서만 자신들을 부각하였다. 신질서 시기엔 독재 권력에 기대는 것이, 그리고 개혁시기엔 인권 개념에 기대는 것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데엔 가장 효과적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진정인의 과거행적과 더불어 인도네시아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범죄자의 인권을 거론하는 일에 대한 부담감은 인권위의 진상규명 노력의 틀짜기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페트루스 사건에 대한 인권위의 사전조사보고서는 페트루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정당한 재판 없이 처형된 범죄자 개인들에 대한“인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수하르토 집권 시기 “국가 폭력”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인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도모도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조직해야 할 사안인 게다.
글/그림 조윤미 (덕성여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동남아센터 신흥지역연구단 공동연구원)
*본 고는 2012년 서남포럼 뉴스레터의 ‘심층분석 아시아’ 코너에 게재되었던 바 있습니다.